[광화문에서/강수진]나는 ‘꽈당 투혼’이 싫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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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 문화부장
강수진 문화부장
얼마 전 강원 인제에서 SBS 라디오 공개 방송이 열렸다. 신인 걸그룹 ‘여자친구’는 빗물이 흥건한 무대에서 춤을 추다 미끄러져 8번이나 넘어졌다. 누군가가 동영상으로 이를 찍어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고, 결과는 완전 ‘대박’이었다.

4분 3초짜리 공연 영상은 미국 영국 일본 멕시코 등 해외에서도 화제가 됐고 유튜브 조회수는 일주일여 만에 600만 건을 돌파했다. 싸이 이후 가장 많이 본 K팝 동영상이다. 동영상에 나오는 댄스곡 ‘오늘부터 우리는’은 뒤늦게 음원 인기 차트에 진입해 7위까지 오르며 ‘역주행’ 중이다.

동영상이 화제가 된 건 공연 도중 너무 많이 넘어져서가 아니라 그때마다 일어나서다. ‘쿵’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릴 만큼 세게 엎어져도 10대 소녀들은 반사적으로 발딱 일어나 ‘칼군무’를 다시 소화해냈다. ‘꽈당 투혼’ ‘오뚝이 투혼’이라는 찬사와 함께 댓글이 수천 개 달렸다.

“엄청 아팠을 텐데 꿋꿋하게 일어서는 모습이 뭉클했다” “진정한 프로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다”….

한국 걸그룹의 투혼 뒤엔 혹독한 현실이 있다. 신인 걸그룹의 데뷔 과정을 담은 책 ‘대한민국에서 걸그룹으로 산다는 것은’(이학준 지음·아우름)에는 연습생의 트레이닝 모습이 나온다.

“…한밤중에 갑자기 깨워서 음악을 틀어도 완벽한 동작이 나올 만큼 연습해야죠. 그건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는 거예요. 마치 한 사람이 춤추는 것처럼.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각도까지 정확해야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걸그룹 중 뜨는 건 극소수다. 나머지는 ‘막대한 투자금’을 뽑기 위해 지방 축제부터 군부대 위문공연까지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무리한 스케줄이라도 맞춰서 다녀야 한다. 지방공연을 다녀오던 신인 걸그룹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2명이 빗길 과속 교통사고로 숨진 것도 1년 전 이맘때다.

동영상 마지막 장면. 공연을 끝내고 굳은 얼굴로 퇴장하는 걸그룹 멤버들을 향해 객석의 삼촌팬들은 위로의 함성을 외친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 않다. 소녀들은 삼촌팬의 위로가 아닌 주최 측의 사과를 받았어야 했다.

한 신인 가수 매니저는 “녹화 방송이었던 만큼 관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연을 멈춘 뒤 무대를 정리했어도 됐을 텐데 톱스타가 아닌 신인 걸그룹이라 차마 말도 못 꺼냈을 것”이라고 했다.

프로페셔널한 자세는 신인 걸그룹 같은 ‘을’에게만 요구되는 게 아니다. ‘갑’인 주최 측도 마찬가지다. 무대 관리자는 ‘프로답게’ 무대가 미끄럽지 않은지 미리 살폈어야 했고 비올 때를 대비해 무대에 깔 매트라도 준비해야 했다. 자다 깨서도 완벽하게 춤 출 수 있는 걸그룹이 8번이나 넘어질 만큼 무대 환경이 나빴다면 안전책임자는 춤은 생략하고 서서 노래만 부르도록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꽈당 투혼’에 박수치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안전불감증이 ‘투혼’으로 포장돼 가려지고 있는 건 아닌지. 무대가 미끄럽다는 이유로 걸그룹이 섹시한 댄스 없이 노래만 부르겠다고 해도 기꺼이 “괜찮아”를 외쳐줄 수 있는지.

‘꽈당 투혼’ 동영상을 본 수만 명이 ‘좋아요’를 눌렀지만 굳이 ‘싫어요’를 누른 어느 팬의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일이 또다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댓글에 ‘좋아요’를 보태고 싶다.

강수진 문화부장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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