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트럼프 돌풍에 흔들리는 미국 민주주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6일 03시 00분


황호택 논설주간
황호택 논설주간
도널드 트럼프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이 모델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영화배우 말라 메이플스다. 세 번째 부인은 속옷 모델 출신이다. 미스 유니버스, 미스 USA 같은 미인대회를 운영하면서 모델들과 숱한 염문을 뿌렸다. 마음에 안 드는 여성들에겐 “살찐 돼지” “역겨운 짐승” 같은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최근 공화당의 대통령 경선 후보로 나선 칼리 피오리나 전 HP 회장(여)을 향해서는 “그게 차기 미국 대통령의 얼굴이라고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습니까”라고 외모 비하 발언을 했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지켜야 할 품격 있는 언어, 예절, 신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대선 집회에 나온 관중은 그의 막말에 열광하고, 그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공격할 때마다 박수를 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카지노에서 도박 중독자들의 지갑을 털어 부를 축적했다.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면서 마피아와 연루됐다는 의혹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퍼게이트를 조사하는 데 천문학적 예산을 쓰고, 모델과 요트에서 밀회하는 장면이 들통 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상원의원이 중도 하차했던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데 아무도 트럼프의 문란한 사생활과 기업윤리를 문제 삼지 않고 있다.

그는 재산이 100억 달러를 넘는다고 큰소리치면서 스스로 선거자금을 충당할 것임을 밝혔다. 물론 ‘100억 달러’는 100% 과장이다. 선거기구의 보고서에 따르면 트럼프의 재산은 14억 달러가량. 선거자금이 궁하지 않기 때문인지 기업과 헤지펀드 공격도 주저하지 않는다. 기업들이 값싼 외국인 노동력을 이용해 미국의 실업자들을 희생시킨다고 비난한다. 그는 “헤지펀드 경영자들이 세법의 구멍을 이용해 제대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서 “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중산층의 세금을 감면해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처음 대통령 후보 경선 참여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는 지금 공화당 후보 중에서 지지율 1위다. 과연 트럼프는 내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제46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을까. 영국의 유력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환상’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도 이것 자체로 미국의 민주주의가 곤경에 처해 있음을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트럼프가 뜨는 원인을 대중의 소외(public alienation)에서 찾았다. 미국인 10명 중 3명 정도만 워싱턴에서 그들의 견해가 대변되고 있다고 여론조사에서 답할 정도로 다수가 정치적으로 소외돼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중산층의 소외의식을 파고든다.

트럼프의 인기는 미국 민심의 흐름에 뿌리가 닿아 있기 때문에 대외정책 관련 발언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이 있는 섬에 건설한 활주로에 대해 “그 섬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요. 우리는 (그 외에도) 많은 문제가 있죠”라고 말했다. 중국의 팽창주의에 크게 개의치 않는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환율 조작과 외국 상품에 대한 고율 관세를 거론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도둑이 중국”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부자 나라 한국을 미국이 지켜주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이렇게 돈이 많은 나라를 보호해주고 우리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른 한국의 역할을 강하게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6·25와 베트남전쟁 때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공산권은 붕괴했고 미국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석유자원의 운명이 걸린 중동에 온통 쏠려 있다. 트럼프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나라들의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미국인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트럼프식 고립주의가 미국에 팽배하다면 우리의 안보 환경에 미칠 영향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된 나라에서도 선동가들이 선거에서 승리한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에서도 주류 후보가 당선되던 전통이 이번에도 계속되리라는 확고한 보장은 없다. 다가오는 2017년 한국 대선에서도 포퓰리스트 선동가가 돌풍을 일으키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뜻에서 여야 정치인들은 정치적 소외의식을 느끼는 대중의 갈증을 얼마나 충족시켜 주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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