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배극인]공기가 지배하는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1일 03시 00분


배극인 도쿄 특파원
배극인 도쿄 특파원
2012년 2월 동일본 대지진 1년 취재차 미야기 현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손녀를 잃었다는 할머니를 우연히 만나 심경을 물어봤으나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어색한 일본어로 통사정을 하자 할머니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살핀 뒤 어느 나라 언론이냐고 물었다. 왜 말을 안 하려는지 눈치를 챘다. 기자는 일본어로는 기사가 안 나온다고 설명했다. 할머니는 그제야 가슴에 맺힌 아픔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정부의 엉터리 대처를 비판하는 대목에선 눈물까지 글썽였다. 남들 앞에서는 감정 표현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 사회의 한 단면이다.

한국으로 가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급감한 이유도 분위기쯤으로 번역되는 ‘공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원여행이나 수학여행을 한국으로 간다고 하면 주변에서 어떻게 볼지 걱정돼 아예 포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개인 여행객이라고 다를 건 없다. 케이팝 팬인 50대 일본 여성은 한국에 갈 때마다 친정 친척을 한 명씩 죽인다며 멋쩍어했다. 남편에게 한국에 여행 다녀오겠다고 차마 말을 못해 장례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공기’의 위력은 대단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자민당 내에 자신에게 반항하기 어려운 공기를 만든 뒤 8일 아무 저항 없이 자민당 총재에 연임됐다. 각 파벌 영수들은 일찌감치 ‘충성’을 다짐했고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나선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전 자민당 총무회장은 후보 등록에 필요한 추천인 20명도 모으지 못했다. 일본의 한 정치학자는 “일본 정치의 전형인 대세 편승주의와 방관주의”라고 비판했다.

시곗바늘을 돌려 80년 전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침략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당을 해산하고 출범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라는 관제 국민통합기구가 자국민과 이웃 나라를 사지(死地)로 몰아넣을 때 정치인과 언론들은 군부가 만든 ‘공기’ 살피기에 급급했다. 특히 신문은 거짓 전과를 부풀린 군부의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쓰며 국민들을 선동했다.

일본에 오래 산 한 한국 기업인은 지방일수록 마을의 ‘공기’에서 어긋나면 집단으로 따돌리는 무라하치부(村八分)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다며 혀를 내둘렀다. 대정익찬회의 현대판 하수조직은 마을자치회인 조나이카이(町內會). 전직 관료나 교사가 주로 회장을 맡아 정부의 시책에 충실하게 분위기를 몰아간다. ‘공기’ 얘기를 꺼낸 것은 엊그제 통과한 일본의 안보법제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갖가지 견제 장치를 마련했다고 주장하지만 ‘공기’만 조성되면 언제든지 잘못된 길로 다시 달려갈 수 있는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한미 동맹의 후방 지원 역할을 하는 미일동맹을 강화해 경계할 일만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입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해석 개헌과 날치기 통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확인된 ‘집단 사고’는 여전히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어도 함께 건너면 무섭지 않다’는 일본 속담이 불현듯 머리에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만 안보법제 통과 과정에서 목소리를 낸 일본 국민과 젊은 세대의 반대 시위는 일본의 새로운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주 마지막 회를 방영한 TV 드라마 ‘하나사키 마이가 잠자코 있지 않아’는 은행 내부의 불의에 맞서 할 말은 하는 젊은 여주인공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파트너인 상사가 매회 “구키오 욘데(空氣を讀んで·공기를 읽으라)”라고 당부하지만 여주인공은 당당하게 할 말을 한다. 이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것은 일본 사회를 눌러온 ‘공기’에 새바람이 불어오는 징조인지도 모른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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