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기자의 문학뜨락]소설 표지 카피, 누구를 향한 글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23일 03시 00분


21세기북스 문학기획팀이 최근 낸 트렌드 보고서는 흥미롭다. 올 1월부터 9월 초까지 출간된 한국 소설 100여 종의 홍보 문구를 살펴본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책의 띠지와 표지의 카피를 통해 본 결과 한국 소설의 주제는 4가지 정도로 모아졌다. △쇠락 △소외 △사랑 △행복 등이었다. ‘쇠락’은 인간의 노화나 일상의 파괴, 세계의 몰락 등을 다룬 내용이 주를 이뤘다. ‘소외’에는 고독과 상실 등의 주제가 포함됐다. ‘사랑’과 ‘행복’의 경우 ‘그래서 사랑하고 행복했다’는 해피엔드의 결말이 아니라 사랑에 실패하고 행복을 얻지 못해 암울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주목할 부분은 카피 경향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소설의 홍보 문구는 대개 엄숙하고 진지한 단어들의 나열로 이뤄졌다. ‘욕망’ ‘세계’ ‘운명’ ‘고독’ ‘부재’ ‘천착’ ‘도저하다’ 같은, 일상적으로 빈번하게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홍보 문구에 자주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무거운 주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관념적인 어휘들의 조합은 문학 출판사들이 고수해온 카피 트렌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띠지나 표지의 홍보 문구는 책이 독자와 가장 먼저 만나는 구절이다. 독자의 시선을 끌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홍보 문구가 일반 독자들에게 낯설고 생뚱맞게 느껴지는 단어라면?(사실 친구들과 대화할 때, 블로그나 SNS에 글을 올릴 때 ‘부재’나 ‘천착’ 같은 단어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김수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최근 한국 소설의 홍보 문구에 사용되는 어휘들은 대개 비평가들의 평론에서 많이 사용되는 언어”라고 말한다. 이른바 ‘문학 판의 전문용어’인 셈이다. 이런 전문적인 용어가 일반 독자들을 향한 홍보 문구로 쓰이는 데 대해 김 교수는 “그만큼 한국 소설의 작가와 편집자, 출판사가 독자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비평적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출판사 편집장도 “이런 홍보 문구가 작품에 문학적인 아우라를 만들어준다고 여겨졌겠지만 실제로는 일반 독자와 고급 독자를 경계 짓는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장강명 김중혁 김려령 씨의 소설을 주목했다. 기간제 결혼을 다룬 김려령 씨의 ‘트렁크’는 ‘서른 살, 다섯 개의 결혼반지’를, 김중혁 씨의 ‘가짜팔로 하는 포옹’은 ‘김중혁 첫 연애소설집’을 카피로 내세웠다. 장강명 씨의 소설 표지는 띠지 없이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만 실렸다. 올해 출간돼 모두 1만 부 이상 찍은 이 책들의 카피는 간소하고 어렵지 않은 어휘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독자들은 소설에서 재미와 의미를 함께 얻고자 하는데 한국 소설의 홍보 문구들은 재미는 빼고 의미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소설 카피뿐 아니라 한국 소설의 엄숙한 내용을 아우르는 지적임은 물론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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