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폴크스바겐의 교훈, 싸고 좋은 것은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7일 03시 00분


폴크스바겐의 세단 ‘페이튼’ 취재 당시 촬영한 사진으로 직접 만든 그림엽서. 이번 사태가 ‘싸고 좋은 것’만 찾는 탐욕에서 온 것임에 동의한다면 독일과 독일인을 폄훼하는 잘못은 피해야 한다.
폴크스바겐의 세단 ‘페이튼’ 취재 당시 촬영한 사진으로 직접 만든 그림엽서. 이번 사태가 ‘싸고 좋은 것’만 찾는 탐욕에서 온 것임에 동의한다면 독일과 독일인을 폄훼하는 잘못은 피해야 한다.
초등학교 3학년, 1967년의 일이다. 당시 TV는 부의 상징이었다. 그땐 나도 여느 아이들처럼 옆집에서 그걸 얻어 보곤 했다. 당시 또래에겐 미국의 만화영화 디즈니랜드와 전쟁 영화 ‘전투(Combat)’가 최고 인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전투’가 결방됐다. 이유도 없이. 그게 무척이나 서운했던가 보다. 40년이 흐른 뒤에도 또렷이 기억했던 걸 보면. 2007년, 친구와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뒤늦게 결방의 배경을 알게 됐다. 독일 대통령이 방한한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는 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선에 배치된 어느 미 육군 분대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거기서 독일군은 무찔러야 할 ‘악의 축’. 드라마는 늘 미군이 독일군에 승리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니 어린 내가, 아니 우리 국민 모두가, 독일은 ‘나쁜 나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독일 대통령을 초청해 놓고 그런 드라마를 방영하는 게 꺼림칙했던 것 같다. 나는 그 독일 대통령이 누구인지 찾아봤다. 하인리히 뤼브케. 한국을 찾은 최초의 독일 정상이다.

독일 대통령의 방한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아프리카의 최빈국처럼 가난하고 초라한 나라인 데 반해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부국에 오른 경제 대국이었다. 그러니 뤼브케가 방한하기까지 사연이 없을 수 없다.

얘기는 196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서 시작된다. 차관을 기대하고 미국을 찾아갔으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반응은 냉담했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 그러자 박 대통령은 독일로 눈길을 돌렸다. 즉시 차관교섭사절단을 보냈고 우여곡절 끝에 1억500만 마르크(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 도입에 성공한다. 광부와 간호사 파독도 그때 논의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외화도 벌고, 그들의 봉급은 당시 우리로선 제시하기가 불가능했던 ‘은행지급보증’도 대신했다. 3년 후인 1964년 독일은 박 대통령을 초청했다. 루르 탄광에서 박 대통령과 파독 광부가 만나는데, 그날의 안내자가 뤼브케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의 독일 방문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있게 된 아이디어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당시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 씨 인터뷰(동아일보 2013년 4월 1일 자)를 통해서다. 아이디어를 준 사람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당시 독일 총리. 그는 정상 만찬에서 박 대통령에게 많은 조언을 했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들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소부터 지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가동해야 한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니 중소기업 육성도 필요하다. 이 모든 걸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실제로 그는 5명의 경제고문을 파견했다.

에르하르트는 ‘모두를 위한 번영’이란 슬로건 아래 독일 경제를 부흥시킨 초대 경제장관(1949∼1963) 출신. 그날의 조언은 대한민국 산업 구조 개편의 청사진이 됐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우리는 프랑스와 16번이나 싸웠다. 그래도 종전 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를 나눴다. 한국도 일본과 그러길 바란다’고. 한일협정은 이듬해 체결됐다. 그는 의외의 선물도 줬다. 무담보 차관 2억5000만 마르크. 박 대통령은 그 3년 후 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다. 일본에서 받은 자금과 독일 차관은 국가 발전의 마중물이 됐다.

굳이 독일 얘기를 꺼낸 이유. 짐작했겠지만 일파만파로 비화하는 폴크스바겐 사태가 독일 자체를 비난하는 쪽으로 변질될까 우려돼서다. 소비자를 기만한 폴크스바겐을 질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게 독일과 그 국민에 대한 비난과 폄훼로 흘러가는 것은 옳지 않다. 사태의 본질은 ‘인간의 탐욕’이다. 대규모 회계 조작의 엔론 사태(2010년), 전 세계 은행을 파산시켜 지구촌을 몰락시킬 수도 있었던 리먼 사태(2007년)도 그렇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던가. 나는 이번 사태를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교훈으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싸고 좋은 것이 없듯 고출력에 연비까지 높은 엔진은 없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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