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인이 시집간 지 몇 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그 충격으로 시아버지는 앞을 못 보게 되었다. 가난한 살림에 혼자서 시아버지를 봉양하는 젊은 딸이 안타까워 친정어머니는 자꾸 개가를 권하였지만 여인은 한사코 거절하였다.
어느 날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이 와서 친정에 갔는데 사실은 딸을 개가시키려고 거짓으로 꾸민 일이었다. 여인은 짐짓 허락하고는 목욕을 하겠다며 뒷마당으로 가더니 담장 틈으로 달아났는데 도중에 그만 커다란 호랑이와 맞닥뜨렸다. 여인이 외쳤다. “내가 잘못하였느냐? 부모님이 거짓으로 나의 뜻을 기어이 꺾으려 해서 내가 도망쳤는데 그게 잘못이라면 죽여라.” 그러자 호랑이는 앞장서서 여인을 인도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본가에서 뒤늦게 알고 사람을 풀어 추격하였지만 호랑이가 문 앞에 버티고 있자 모두 달아났다. 여인이 호랑이에게 말하였다. “네 덕에 무사하였으나 보답할 것이 없구나. 있는 거라곤 개 한 마리뿐이니 이걸로 요기나 하고 제발 사람들이 파 놓은 함정에는 빠지지 마라.”
기구한 운명의 여인에게 호랑이는 아마도 수호신이었나 봅니다. 서경창(徐慶昌·1758∼?) 선생의 ‘학포헌집(學圃軒集)’에 실린 ‘영남효열부전(嶺南孝烈婦傳)’입니다.
다음 날 새벽, 호랑이가 함정에 빠졌다며 온 마을이 시끄러웠다. 여인은 그 호랑이인 줄 짐작하고 시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저것은 짐승이고 저는 사람인데 저것이 이미 나를 살려 주었거늘 제가 그를 살려 주어 보답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되어 짐승만 못해서야 되겠습니까(彼獸也, 我人也. 彼旣活我, 我不報彼以活, 可以人而不如獸乎)?”
여인은 마을 어르신들께 가서 사연을 얘기하고 호랑이를 살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어렵사리 허락을 받은 여인은 함정으로 내려가 호랑이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너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면서 어찌 내 말을 안 듣고 여기 빠졌느냐? 내가 마을 분들께 부탁하여 너를 살려 주도록 하였으니, 이곳을 나간 뒤에는 혹시라도 사람은 해치지 마라.” 밖으로 올라온 호랑이는 바람처럼 달아났다. 시아버지는 이웃 사람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들으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함정에 들어갔어요”, “호랑이를 쓰다듬어요”, “데리고 나왔어요”, “멀리 달아났어요” 소리에 “호랑이가 정말로 달아났소?” 하다가 갑자기 두 눈이 환해지더니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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