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의 시장과 자유]‘조·상·제·한·서’ 몰락을 떠올리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7일 03시 00분


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금융 담당 일선기자였던 1990년대 초반 은행권의 주역은 ‘조·상·제·한·서’였다.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을 당시 이렇게 불렀다. 국민은행 정도가 비슷한 대접을 받았고,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은 ‘마이너’였다.

전통을 뽐내며 안주하던 ‘조·상·제·한·서’는 지금 모두 사라졌다.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에, 서울은행은 하나은행에 합병됐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우리은행으로 탈바꿈했고, 제일은행은 외국계에 넘어갔다. 반면 ‘찾아가는 영업’과 인터넷 뱅킹을 도입한 신한은행, 프라이빗뱅킹(PB) 업무를 시작한 하나은행은 약진했다.

한국 금융의 우울한 현실

20여 년 동안 은행들의 부침(浮沈)이 심했지만 금융 산업의 규모와 경쟁력이 글로벌 플레이어와 거리가 멀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영국의 국제금융전문지 ‘더 뱅커’가 분석한 세계 1000대 은행 순위에서 50위 안에 들어간 한국계 은행은 한 곳도 없다. 우리 경제력 규모가 세계 13위이고, 제조업의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가 해당 업종 ‘톱 10’에 자리 잡은 현실과 대조적이다. 한국 금융의 경쟁력 순위를 세계 87위로 매긴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의 객관성을 둘러싼 논란도 있지만 금융 소비자들의 불신이 팽배한 현실을 반영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요즘 금융권, 특히 은행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높은 급여와 화이트칼라 이미지로 웬만한 ‘스펙’으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 하지만 인재들을 모아놓고도 세계와 경쟁하는 혁신은 꿈도 못 꾸고 좁은 국내시장에서 도토리 키 재기식 경쟁에 열을 올린다. 은행들의 평균 총자산순이익률(ROA)이 0.3%에 그칠 만큼 수익성도 열악하다. 이런 흐름이라면 ‘조·상·제·한·서’ 같은 참담한 결말을 맞는 곳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정보기술(IT)과 금융, 산업과 금융의 결합이라는 거대한 물결은 더 큰 변수다. 미국 GM이 설립한 인터넷전문은행 앨리뱅크는 자산 1015억 달러의 대형 은행으로 성장했다. 일본 소니가 주도한 소니뱅크도 활발히 영업 중이다. 세계가 주목하는 중국 알리바바의 인터넷은행도 출범이 임박했다.

이런데도 한국에서는 천하태평이다. 우리 은행법은 산업자본이 의결권을 지닌 은행 지분을 4% 이하로만 가질 수 있게 제한했다. 금융위원회는 인터넷은행에 한해 산업자본의 지분보유 한도를 50%로 높이는 내용의 은행법 개정안을 올해 7월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제출했지만 자산총액 5조 원 이상 61개 그룹은 여전히 ‘4% 룰’에 묶었다. 이 정도의 은행법 개정안도 아직 상임위원회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금산분리 이대로 좋은가

금산분리 규제의 명분을 모르진 않지만 세계의 금융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현실에서 종합 득실을 따져볼 때가 됐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에 넘어간 국내 은행들이 거의 예외 없이 헐값 매각과 국부 유출 논란에 휩싸인 것도 마땅한 ‘국내 후보’를 찾기 어려웠던 탓이 컸다. 최근 불거진 독일 폴크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 추문은 구미(歐美) 기업이 한국 기업보다 더 윤리적이라는 인식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자동차가 내년 상반기 독일에 인터넷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국내 제조업체의 해외 금융업 진출 신호탄 의미를 지닌다. 다른 기업들도 외국에서 인터넷은행이나 일반 은행을 만드는 날이 올 것이다. ‘미국 삼성은행’ ‘독일 현대차은행’ 같은 한국 산업자본이 세운 해외 금융회사들이 현지에서 새로운 수익과 일자리 창출을 한다는 뉴스가 전해져야 한국 사회는 정신을 차릴 것인가.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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