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2일 국회 본회의장. 노무현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말했다.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수 없도록 선거법을 개정한다면 17대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에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습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요즘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선거제도 개편을 요구하는 것이 2003년 당시 대통령과 묘한 데자뷔를 일으킨다. 노 대통령은 독일식 국회의원 선거제 또는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조건으로 총리직을 한나라당에 넘겨주는 대연정(大聯政)을 구상했다. 문 대표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합의해주는 반대급부로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을 기대했을 것이다.
의석수 결정 없이 꼼수만 궁리
하지만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부산 경남에서 30∼40%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보이고 있는 새정치연합은 영남권에서 의석을 대폭 확대하는 반면, 호남에서 10% 안팎에 그치는 새누리당의 의석 증가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이 수용할 리 없는데도 문 대표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비례대표를 한 석도 못 줄인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지역구 간 인구 편차를 헌법재판소가 요구한 2 대 1 이내로 맞추기 위해 지역구 수 증가와 그만큼의 비례대표 의석 감소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어 입씨름만 되풀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여야는 선거구획정위에 건네줘야 할 지역구 및 비례대표 의석수를 정하지도 못했고, 13일까지 국회에 선거구획정안을 제출해야 하는 획정위는 몸이 달아 자체적으로라도 지역구 및 비례대표 수를 정해보겠다고 나섰다. 여야는 제 할 일도 못하면서도 획정위에 대해 “인구 감소로 통폐합이 불가피한 농어촌 의석수의 감소는 안 된다”고 압박하며 농어촌에 다른 시군구의 일부를 떼어 붙여 구제해주는 게리맨더링까지 거론하고 있다. 지난해 6·4지방선거 때는 기초선거 무(無)공천을 ‘새 정치’의 상징으로 천명했던 새정치연합이 정작 당내 반대론에 밀려 방침을 선회하는 과정에서 새누리당과 험한 설전을 벌였다.
선거제도보다 어지러운 ‘룰 전쟁’은 당내 후보 공천 규칙을 둘러싸고 늘 벌어졌다. 지금 새누리당의 비박(비박근혜)과 친박(친박근혜)들이 국민공천과 전략공천을 놓고 싸우고 있다면, 2012년 총선 때는 ‘25% 컷오프 물갈이’를 놓고 친박과 친이(친이명박)들이 싸웠다. 그해 대선에선 정몽준 이재오 의원이 요구한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를 놓고 싸웠다.
선거 때마다 룰 전쟁이냐
새정치연합은 이번에 혁신위의 공천안을 놓고 친노(친노무현)와 비노가 싸우지만 지난 총선과 대선에선 모바일 경선의 공정성을 놓고 싸웠다. 오로지 자기 계파의 밥그릇을 늘리기 위해 선거 때마다 새로운 룰을 들이대며 싸우는 통에 가치와 비전의 경쟁은 실종되고, 유권자들에게 대체 무슨 약속을 했는지 자기들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2007년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고스톱 치다가도 ‘룰’을 바꾸는 법은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원칙이 오락가락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튼실할 리 없다.
미국의 선거제도나 후보 선출 규칙은 선거 때마다 바뀌지 않는다. 독일에선 주요 정당들의 후보 선출 절차까지 연방법에 규정돼 있다. 선거 때마다 ‘룰의 전쟁’을 벌이는 나라의 정치인들은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위인설법(爲人設法) 해달라고 조르는 불량선수들과 뭐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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