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손으로 쓴 글씨를 질리도록 봤다. 동아일보 수습기자 작문시험 답안지였다. 글자 모양이 그야말로 각인각색이었다. 한글에도 필기체가 있나 싶게 흘려 쓴 글자도, 태풍이 불 때 한글을 깨쳤는지 모로 누운 글자도 있었다. 깔끔하고 단아한 글씨는 가물에 콩 나기로 아주 드물었다. 악필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도 많았다. 글씨를 정성 들여 또박또박 쓰는 일은 ‘키보드 시대’ 들어 사라진 듯했다. ‘얼, 말, 글’을 강조한 옛 한글학자들은 글씨도 바르게 쓰라고 당부하지 않았을까.
훈민정음을 세종이 만들었다면 현대 한글은 한힌샘 주시경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주시경은 ‘한글’이라는 말을 처음 썼고 문법도 최초로 정리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주시경과 고향이 황해도로 같았고 나이는 한 살 위여서 친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졸업식 때 영어 연설을 할 만큼 영어를 잘했다.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 아닌가. 한글학자는 아니지만 한글에도 소신이 뚜렷했다. 연설 원고를 직접 썼던 그는 주시경과 달리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 ‘없었다’를 ‘업섯다’로, ‘좋아한다’를 ‘조하한다’로 쓰는 식이다. 그는 전 국민이 이를 따르도록 여러 번 밀어붙였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무시한 처사였다. 외솔 최현배가 문교부 편수국장직을 사직하는 등 식자층이 들고일어나 가까스로 막았다. 1953년 시작된 ‘한글 파동’이다. 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은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고집쟁이 이 대통령이 자기 고집을 굽힌 것이 이때가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주시경 제자 중에 백연(白淵) 김두봉이 있다. 배재학당에서 스승을 만났고 다섯 살 아래인 최현배를 동지로 사귀었다. 주시경의 수제자로 스승을 이어 한글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3·1운동에 뛰어든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그곳 인성학교 교장으로 한글을 교육했다. 직접 쓴 ‘깁더 조선말본’이 교재였다. 깁더는 깁고 더했다는 뜻이니 개정판이다.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로, 백범(白凡) 김구를 보좌했던 김광주는 ‘정말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주야로 침식을 저버리고 몰두했던 한글학자’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는 광복 후 북으로 갔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는 등 연안파로 대접받다가 숙청됐다. 북한 어문정책의 틀을 잡아 남북의 한글이 영 딴판이 되지 않게는 했다. 역사가 이이화는 김두봉이 의열단 김원봉의 외삼촌이라고 했으나 무정부주의자 정화암에 따르면 ‘바람둥이’ 김원봉은 김두봉의 조카딸과 재혼했다.
이희승은 20세 늦깎이로 중앙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조선어문법을 김두봉의 ‘조선말본’으로 익혔다. 외울 것이 많아 모두 싫어한 조선어문법을 이희승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때 인촌(仁村) 김성수로부터 경제원론을 배웠고 그 인연으로 1963년 동아일보 사장이 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돼 함흥형무소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는 6·25전쟁 직전부터 국어사전 편찬에 뜻을 두고 준비했다. 9·28수복 하루 전 전투지역 한가운데 있던 집에 불이 나 책 수천 권은 물론이고 사전 편찬용 카드가 모두 타버렸다. 그의 마음을 역사가 김성칠은 이렇게 전한다. “나는 목숨만 살아남았을 뿐 내 생명의 반은 불길에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희승의 역저 ‘국어대사전’은 11년 뒤 27만 어휘를 담아 출간됐다. 서점에 내놓자마자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세종은 한글을 어리석은 백성에게 하사했다. 한글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로 569번째 생일을 맞았다. 지금은 국민 누구나가 한글의 주인이다. 우리는 과연 한글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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