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기자의 달콤쌉싸래한 정치]배신의 정치, 탐욕의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2일 03시 00분


이재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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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는 책 ‘감정수업’에서 “사랑 자체가 일종의 배신행위”라며 도발적 화두를 던졌다. 가족 구성원으로 존재하다가 낯선 이성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 그리하여 기존에 속한 무리를 부정하도록 만드는 사랑이란 감정은 결국 배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마저 배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데, 탐욕과 불신이 넘쳐나는 정치판에선 오죽하겠나. 정치사는 곧 배신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YS)를 적극 지원한 민정계 출신을 꼽으라면 김재순 전 국회의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그해 5월 YS의 찬조 연설자로 나서 YS를 중국 통일의 주역인 한고조 유방이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YS는 집권 후 정치권 물갈이에 나섰고, 그는 ‘토사구팽’이란 말을 남기고 탈당했다. 토사구팽은 유방에게 버림받은 개국공신 한신이 남긴 말이다. 역사는 ‘무한 반복’라는 말이 실감난다.

배신은 2015년에도 정치판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대구경북(TK) 지역 의원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박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국회 횡포’를 문제 삼을 때 자신의 편이라고 여긴 TK 의원들이 ‘나 몰라라’했다는 이유에서다.

‘순망치한’ 관계인 유 전 원내대표를 잃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고립도 심화하는 것 같다. 하지만 김 대표가 고립보다 참기 힘든 건 또 다른 ‘배신’인 듯싶다. 이번에는 김 대표가 원유철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애초 비박(비박근혜)계는 원 원내대표 추대에 시큰둥했다. 유 전 원내대표의 러닝메이트로 정책위의장이었던 원 원내대표가 정치 도의상 동반 사퇴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원 원내대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원 원내대표는 추대에 앞서 김 대표에게 철석같이 약속했다고 한다.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대표님이 오픈프라이머리를 추진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하겠습니다.” 그랬던 그가 돌변했다. 맨 앞에서 오픈프라이머리를 흔들더니 공천 룰 논의기구 구성을 두고도 철저하게 친박(친박근혜)계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비박계는 원 원내대표가 김 대표를 흔들고 현 지도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내년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여권의 샛별’로 떠오르고 싶어 한다는 것. 내년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자리를 노린다는 말도 들린다.

4선 중진 의원이지만 제대로 된 당직을 맡지 못한 채 사그라질 위기에 처했던 원 원내대표가 그런 욕심을 낸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새누리당에는 전례도 있다. 원 원내대표와 비슷한 처지였던 황우여 사회부총리는 2011년 친박계를 등에 업고 원내대표에 당선되더니 당 대표, 부총리까지 거머쥐었다.

‘벼락출세’를 눈앞에 두고 평정심을 잃는 일은 여의도에서 숱하다. 김태호 최고위원은 2010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단박에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사소한 거짓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자신의 정치적 체급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최고위원직 사퇴 번복, 총선 불출마 선언 등 잇단 돌출행동으로 ‘4차원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후보자 시절 ‘언론 외압 발언’ 등 상식 밖의 얘기를 쏟아낸 것도 자신의 오랜 꿈(대통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평정심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2년 만에 경남도지사직을 내던지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결국 지역 기반마저 잃은 김두관 전 도지사도 다르지 않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삶에 두 가지 비극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 또 하나는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가지면 더 큰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초심과 평정심을 잃는 순간 남는 건 권력욕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리가 주는 권능을 마치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강신주는 탐욕을 ‘목이 마를 때 바닷물을 마신 상태’라고 비유했다. 갈증은 잠시 해소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강한 갈증이 찾아오는, 치명적 욕망이 바로 탐욕이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이든,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든 스스로의 탐욕을 돌아봐야 할 듯싶다. 배신의 다른 이름은 바로 탐욕이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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