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 자유주의 성향의 국내 학자 8명이 ‘격차, 그 지극한 자연스러움’이란 책을 출간했다. 안재욱 민경국 김이석 김승욱 최승노(경제학) 김인영 이영조(정치학) 신중섭 박사(철학)가 집필에 참여했다. 필자들은 평등 논리에 집착해 소득, 기업 규모, 지역 격차를 무리하게 줄이려는 정책이 낳는 더 큰 폐해를 지적했다. 안재욱 경희대 교수는 “부익부 빈익빈은 자본주의 사회보다 사회주의나 정실주의 사회에서 더 많이 발생하며 소득격차를 악화시키는 핵심 요인은 경제성장 둔화”라고 강조한다.
‘위대한 탈출’ 어떻게 가능했나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인식도 이 학자들과 궤를 같이한다. 작년 9월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위대한 탈출’은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라는 논쟁적 부제(副題)를 달았다. 영화 ‘대탈주’에서 제목을 따온 이 책은 인류가 경제성장을 통해 빈곤과 질병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소개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이 큰 문제라는 식의 주장을 디턴은 정면으로 반박한다. 성장이 불평등을 수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성장의 결과로 지구촌은 절대빈곤과 질병이 줄어들면서 전체적으로 불평등이 축소됐다고 강조한다. 성장과 진보를 이끌어내는 ‘불평등의 힘’을 역설한 그가 노벨 경제학상의 영예를 안은 것은 글로벌 불황 속에서 주류 경제학의 귀환이란 의미도 지닌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1970년대 후반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하면서 ‘능력 있는 자가 먼저 부자가 되라’는 선부론(先富論)을 제창했다. 현재 중국의 개인별, 지역별 소득불평등은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심각하다. 하지만 일부 공산당 간부만 호의호식하고 나머지 국민은 궁핍에 시달렸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중국인은 드물 것이다.
한국은 중국이나 인도에 앞서 ‘위대한 탈출’에 성공한 대표적 국가다. 박정희 정부가 차별화 성장전략이 아니라 농업 주도나 산업별, 기업별 균등 전략을 택했다면 오늘날 한국의 모습은 대다수 후진국과 비슷할 공산이 크다. 산업화 성과를 깎아내리려는 세력은 ‘기업과 정부의 정경유착’과 ‘재벌이라는 독점자본’을 들먹인다. 그러나 성장의 과실이 일부 계층만 아니라 대다수 국민, 심지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운운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노무현 정부 시절 어느 권력 실세는 한 모임에서 “1인당 소득 5000달러면 어떠냐. 모두 평등한 사회가 중요하다”라며 목청을 높였다. 당시 그 자리에 참석한 인사가 발언 내용을 내게 전하면서 “저런 생각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나라의 미래는 없는데…”라고 걱정하던 일이 기억에 선연하다.
젊은 실세가 호기를 부린 때로부터 대통령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한국경제가 장기 저성장의 터널에 갇힌 것은 여야 정치권과 정부, 상당수 언론이 지난 몇 년간 부추긴 과도한 경제 평등론도 한몫을 했다. 정책이나 사회 분위기가 공허한 명분론에 휘둘리면 ‘경제의 복수’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성장 둔화가 불평등 키운다
세상을 경제논리만으로 재단할 순 없다. 불평등이나 격차를 가급적 줄여나가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잘나가는 사람과 집단의 발목과 뒷덜미를 잡아당긴다고 내 삶이 나아지진 않는다. 내거는 깃발이야 어떻든 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정책이 자칫 성장 동력을 추락시키면 불평등의 축소가 아니라 확대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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