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이후 한반도정책은 평화와 안정 중시
朴대통령 전승절 행사에 초청… 최상의 양국 관계 연출한 中
노동당 70주년에 고위급 파견… 핵 문제로 소원해진 北달래
中의 한반도외교 다음 목표는 남북대화 촉진과 6자회담 재개
중국의 한반도 외교에서 가장 큰 특징은 남북한 어느 한쪽만 보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 일변도의 냉전 외교에서 벗어나 한반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중시하는 외교 정책을 확립한 것은 1982년 중국 공산당 제12회 전국대표대회 이후로 이 방침은 일관돼 왔다.
후야오방(胡耀邦) 당 총서기는 1984년 4월 베이징을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중국의 독립 자주 외교는 일방 편의적인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방침에 대해 “첫째로 한반도 정세의 장기적 안정, 둘째로 연방제 방식에 의한 남북 평화통일 지지”라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또 덩샤오핑(鄧小平) 국가주석은 1987년 5월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가진 북한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목적은 단 하나로 그것은 한반도 통일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는 장기적 과제”라고 솔직하게 밝혔다.
중국이 주장하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은 장기적인 남북 공존을 거쳐 평화통일을 기대하는 것으로, 이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과 국교 수립의 출발점이 됐다. 덩샤오핑은 북한의 무력 도발을 경계해 1983년 북한이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노리고 저지른 아웅산 폭탄 테러에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30년이 지난 현재 그 정책은 과연 바뀌었을까.
그동안 중국은 남한과의 경제 교류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며 1992년 국교를 수립했다. 오늘날은 양국 최고 정상이 빈번히 회담하고 서로 간에 상대국 수도를 방문하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9월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군사 퍼레이드를 관람했다.
박 대통령이 톈안먼 중앙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바로 옆에 앉은 것에 비해 북한에서 파견된 최룡해 노동당 서기는 앞 열 말단 자리가 주어졌다. 이때는 아무도 10월 10일 북한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진행된 군사 퍼레이드를 중국 공산당 서열 5위인 류윈산(劉雲山) 정치국 상무위원이 관람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물밑에서 북-중 접촉이 개시된 듯하다. 이후 약 1개월간 분명 평양의 중국대사관을 통해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의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 축하행사 파견이 논의됐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리진쥔(李進軍) 북한 주재 대사의 전력(前歷)은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이었다.
류윈산을 파견하는 대가로 중국은 북한으로부터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자제한다는 약속을 얻어 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관여 방침은 명확하다. 류윈산은 평양에서 김정은과 회담할 때도 “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 목표를 견지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에 강하게 관여하는 것은 북한의 핵 무장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시 주석은 9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를 평화적으로 실현한다”는 점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위반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류윈산이 김정은과의 회담 때 시진핑의 친서를 전달했다면 북-중 관계는 최악의 시기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듯이 그 친서가 “중국은 북-중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전한 것이라면 시진핑이 김정은의 베이징 방문을 권한 것으로 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 유의해 봐야 할 것은 처음 지적한 중국의 남북한 균형 외교다. 중국과 남한의 관계는 대국적으로 보면 시 주석의 서울 방문과 박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으로 이미 정점에 올라 있다. 중국으로서는 북한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호흡이 긴 중국의 남북 균형 외교 정책의 다음 목표는 ‘평화와 안정’ 강화다. 즉 남북 쌍방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하면서 남북대화를 촉진하고 6자회담을 재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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