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나 교수가 어느 부처의 장관으로 가면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조직과 업무의 기초를 파악하는 데 반년, 일을 제대로 알려면 1년은 걸린다는 말이 공직사회에 내려온다. 공무원들의 외부인사 경시 사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관료 출신이 아닌 전직 장관 중에서도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만났다.
요즘 체면을 다소 구기긴 했지만 중국의 경제정책을 책임진 리커창 총리는 2년 7개월째 현직을 맡고 있다. 전임 원자바오 총리 시절 경제 부총리를 5년 맡았으니 7년 반 이상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다. 일본의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도 3년 가까이 바뀌지 않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1년 3개월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 임기와 성과가 반드시 비례하진 않지만 적어도 정책의 연속성이나 일관성에서는 유리하다.
‘장수 名장관’들의 추억
산업화시대 한국에는 한 직책을 오래 맡아 업적을 남긴 ‘명(名)장관’이 적지 않았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남덕우 경제부총리는 1969년 10월부터 9년 2개월간 재무부 장관(4년 11개월)과 부총리(4년 3개월)를 잇달아 지냈다.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에 공이 큰 김학렬 부총리는 2년 7개월간 불꽃처럼 일하다 49세에 타계했다. 병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더 재임했을 그의 부음이 전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너무 혹사시켜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통곡했다.
1980년대 이후 장관들의 재임 기간이 현저히 짧아졌다. 취임 1년만 지나도 ‘장수(長壽) 장관’으로 불릴 정도였다. 남덕우 부총리 이후 지금까지 최장수 경제팀 수장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는데 그래봐야 2년 4개월이다. 장관급 국제회의의 참석자가 몇 년간 동일한 나라가 많은 반면 한국은 회의 때마다 ‘뉴 페이스’라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됐다.
그제 개각에서 교체된 새누리당 의원 출신인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과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은 올해 3월 임명장을 받았다. 취임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계산하면 7개월짜리 ‘단명(短命) 장관’이다. 관가(官街)의 속설대로라면 업무 파악의 걸음마를 겨우 떼기 무섭게 부처를 떠나는 셈이다. 해당 부처 공무원들은 신임 장관 업무보고 자료 작성과, 청문회 준비로 시간과 인력을 낭비할 것이다. 내년 선거에 나올 정치인을 징발한 대통령의 잘못이 작지 않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어느 정권에서든 여당 의원들은 ‘의원의 장관 겸직 확대’를 주장했다. 당정 협력 등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뻔하다. 책임은 없고 권한은 큰 국회의원과, 부처와 산하기관을 호령하는 장관이 주는 명예와 권한을 함께 누리겠다는 것이다. ‘장관을 거친 의원’이란 프로필을 선거에서 활용하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 의원 겸직 장관은 문제 많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각료를 의원이 겸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현직 의원의 장관 겸직은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고 나는 본다. 정치인 출신 장관의 임기가 짧을수록 폐해는 더 커진다.
현행 5년 단임제 대통령제에서 남덕우 김학렬 장기영 부총리 같은 장수 스타 장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명백히 실패한 공직자라면 재임 기간에 관계없이 문책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걸핏하면 각료를 교체해 ‘장관 값’을 떨어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남은 임기에 현직 의원의 장관 기용을 가급적 배제하기 바란다. 임명한 뒤에는 부처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해 자연스럽게 ‘성공한 장관’이 나올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국가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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