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에서 매일 저녁 클래식 연주회가 열리는 곳이 있다. 연주자는 무명의 젊은이부터 해외 거장까지 다양하다. 객석 390석의 절반이 차지 않아도 거르는 법이 없다. 하프와 첼로 클라리넷 바이올린 등의 선율이 연중으로 흐른다.
이곳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금호아트홀이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2000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때에 언제든 수준급의 클래식 공연을 즐겼으면 한다”는 고(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마련됐다.
국내 음악계에서 박 명예회장은 이미 ‘키다리 아저씨’로 유명하다. 최근 세계 3대 피아노 콩쿠르로 꼽히는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조성진 씨(21)가 1위를 한 것도 그의 지원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박 명예회장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때에도 인재를 발굴해야 한다며 금호영재 콘서트를 만들었다. 금호는 2005년 이 콘서트를 통해 조 씨를 발굴했고 2011년 매년 연주 기회를 주었으며 때로는 항공권 등도 건넸다.
올해 5월 박 명예회장의 10주기 추모 음악회에서였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KAIST에서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 중인 분자생물학 박사 겸 첼리스트 고봉인, 10대에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휩쓴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등 금호영재콘서트의 1기 삼총사가 무대에 올랐다.
삼총사는 차이콥스키가 스승이자 은인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피아노 삼중주 a단조 ‘위대한 예술가를 위하여’를 협연했다. 박 명예회장을 그리는 애틋함이 묻어나는 연주 뒤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리셉션에서 이들은 박 명예회장의 기억 한 도막씩을 회고했다. 손열음은 “콩쿠르에서 탈락하면 ‘얼마나 속상하니, 울고 있을까 봐 연락을 못 하겠구나’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권혁주는 “국내 악기로만 연주했던 어린 학생에게 1700년대 만들어진 유럽의 명품 악기를 손에 쥐여 줬다”고 떠올렸다. 고봉인은 “또래보다 늦게 음악을 시작했는데도 세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줬다”고 고마워했다.
금호는 박 명예회장이 타계한 뒤에도 뜻을 이어받았다. 2006년 대한통운과 대우건설 인수로 자금난을 겪고 2010년 금호산업 등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등 경영난에 허덕여도 재단지원금을 줄이지 않았다. 젊은 음악가를 해외 거장이나 음악 단체에 연결해 줬고 최근에는 연세대에 클래식 음악당을 지어 기부했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비리 등으로 위기를 겪을 때 거액의 기부금을 쾌척해 죄를 씻으려는 ‘그린워시’를 하거나 사회공헌을 홍보 수단으로 삼으려는 일부 기업인과는 분명 대비되는 모습이다. 형 박 명예회장과 동생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은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2004년과 2014년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받았다. 형제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금호아트홀에서는 오늘도 클래식 공연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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