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두침(頭枕)의 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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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 베개
무령왕비 베개
두침(頭枕)의 말 ―이생진(1929∼ )

왕은 돌아가신 뒤에도
왕비와 잠자리를 함께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의 영혼이 눈을 감자
옆에 누웠던 왕비가 놀라는 바람에
베갯머리에 앉았던 봉황 두 마리
땅에 떨어졌다
행복의 미소도
권력의 고함소리도
생명을 잡아 둘 힘도
안개처럼 사라지고
흙 묻은 침묵만 남았다
이젠 더 이상 주검에 베개가 필요 없자
이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임자 없는 베개 한없이 외롭다

역사여, 역사여. 지금 온 나라를 흔드는 부르짖음에 백두대간이 온몸으로 일어서서 가슴에 쓰인 글자들을 읽으라 한다. 그 한 구절을 펼치노니 저 1500년 동안 소나무밭에 잠들어 있던 주인 없는 무덤을 가리킨다.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왕과 비가 묻힌 왕릉임을 밝히는 묘지석(墓誌石)의 말씀과 어마어마한 4600여 점의 유물이 쏟아내는 해와 달의 광채를 보라.

무슨 뜻을 보태어 이 백제 왕업이 불을 뿜는 개벽의 신천지를 펼칠 수 있으리오. 돌에 새긴 글자에 따르면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승하, 525년 8월에 안치되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운명, 529년 2월에 합장하였다고 한다. 제25대 왕위에 오른 무령은 재위 23년(501∼523년) 동안 국방 문화 등 백제 융성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 중 왕이었다.

공주시 금성동 고분군의 하나인 벽돌무덤으로 1963년에서야 사적 13호로 지정되었던 것을 무덤 내부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고자 굴착공사를 하다가 왕릉으로 발굴된 것은 1971년 7월이었다. 아아, 오랜 잠에서 깨어나 손잡고 걸어 나오시는 왕이시여 왕비이시여, 눈 부릅뜨고 똑똑히 보아라. 역사는 이처럼 아무리 단단한 벽돌집, 캄캄한 시간에 가두어도 광명 천지에 참모습을 드러내리라 하시는 것입니까.

오천 점을 헤아리는 보물들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종목 17건에 이르는데 여기 ‘무령왕비 베개’(국보 164호)를 먼저 올리는 까닭은 거북 등에 비천상, 어룡, 인동 등 길상문이 주칠과 금박, 금니 등으로 명장이 정혼과 기예를 다 바쳐 만든 예술작품일 뿐만 아니라 다음 생애의 잠자리에서까지 사랑을 나누는 부부애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젠 더 이상 주검에 베개가 필요 없자/이 세상으로 돌아왔지만/임자 없는 베개 한없이 외롭다”고 오히려 세상 밖으로 나온 왕비의 베개에 따뜻한 위무를 보낸다.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두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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