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밭 은하수에 조각달 스치듯 천지연 미리내에 먹물을 뿌린 듯 오롯한 품 이제, 천 년 전설이 된 정물(靜物)
비바람의 숨결 흙과 불의 조화 속에 태어난 영물(靈物) 너는 뉘 영혼을 살고 있나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나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뿜어나는 매화향기 맑은 대바람소리에 나는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
어디 매화처럼 향기 나는 사람 없소?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나를 지키는 사람은 다 어디 갔소? 여기 반 천 년 전 비록 지체는 낮고 공부는 짧아도 독 짓는 솜씨 하나는 뛰어난 이가 빚은 항아리에 궁실의 화원이 쇳물을 찍어 등걸매화와 풍죽을 흐드러지게 친 ‘철화백자매죽문항아리’(국보 제166호)가 큰기침을 하며 오늘의 참사람 없는 세태를 꾸짖고 있다.
지금도 골동상에 가면 용이네, 봉황이네, 산수문이네, 수복문이네 백자항아리들이 즐비한데 몇만 점도 더 헤아릴 그것들 가운데서 정일품 국보 벼슬을 얻으려면 장원급제 하고도 다시 간택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항아리는 보아하니 주둥이가 깨진 것을 때웠는데도 그 지체 높은 자리에 오른 거라 심상치가 않다. 아마도 저 16세기 도자예술의 대표작일시 분명한데 그 까닭은 크고 잘생긴 몸매에다 매화와 대나무가 서로 어우러져 내뿜는 가슴 서늘한 기상과 품격이 얻어낸 것이리라.
한 생애가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매화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와 맑은 향기로 사군자에서도 첫째로 꼽히어 옛 선비들의 칭송과 완상, 그리고 화재((화,획)材)의 대상이었던 것. 대나무 역시 저 고려의 유신 원천석이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던고/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쏘냐/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라고 치악산으로 세 번이나 찾아온 이방원을 내친 스스로의 충절에 빗대어 시조를 읊었듯 청렴과 개결의 상징이었다. “갑자기 뿜어나는 매화향기/맑은 대바람소리에/나는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는 시구에서 매화 같고 대나무 같은 사람을 찾는 눈빛이 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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