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은 끈질긴 사람이다. 국정원 재직 때부터 고향(부산 해운대-기장을) 출마에 공을 들였다. 그가 어제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에 나타났다. 서울시당의 ‘탈당권유’ 처분에 반발해 최종 심판을 받으러 온 것이다.
총선 출마용 노이즈 마케팅?
당 중앙윤리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그가 낸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당사를 나서는 그에게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 ‘무소속 출마할 건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굳은 표정으로 그는 “말할 수 없다”는 답만 되풀이했다. 그의 팩스 입당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노무현 정부 때 김만복은 인생의 절정을 맞았다. 2급 단장으로 퇴출을 앞두고 있던 그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인수위 전문위원을 거쳐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에서 1년 만에 해외 담당 1차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당시 김승규 국정원장이 2006년 10월 26일 사의를 표명하자 줄을 잘 댔던지 최초의 공채 출신 국정원장이 됐다.
노 대통령이 국정원 안팎의 거센 ‘김만복 불가론’을 누르고 그를 국정원장에 낙점한 이유는 엉뚱했다. 당시 대통령 지지율은 10%, 열린우리당은 8.8%로 최악이었다. 여당 내에서도 당의 간판을 내리고 신장개업해야 한다는 논의가 봇물 터지듯 나왔다. 대통령 퇴임 후를 대비해 영남지역에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김만복은 이런 청와대 핵심 그룹의 무드를 공략했다. 국정원장 때 기장군 주민들을 국정원에 초청해 관리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1차장 때부터 지역구를 관리했다. 정치권이나 지역 인사와의 접촉이 잦다 보니 “밤일 때문에 낮에는 잤다”는 뒷말이 나올 정도였다. 출마 집념이 방해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정보기관 수장에 오른 원동력이었다.
그는 2006년 11월 23일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는 날 노 대통령에게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해 성사시키겠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거론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끈질기게 건의해 마침내 재가를 받아 냈다. 노 대통령은 “너무 무리하지 말라”라고 그에게 당부했다.
추진 과정을 보면 2007년 10월 성사된 2차 남북 정상회담은 ‘김만복의 작품’이 맞다. 그러나 정치에 뜻을 둔 국정원장이 무리하게 기획한 임기 말 정상회담은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그해 대선을 하루 앞두고 북한을 방문해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하다”고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에게 귀띔하는 ‘자기 정치’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를 ‘최악의 국정원장’ 그룹에 올려놓은 것은 2007년 9월 아프가니스탄 인질 석방을 위해 직접 탈레반과의 협상에 나섰을 때였다. 거액의 몸값을 지불했다는 말이 새나온 것은 그렇다 쳐도 비밀요원인 ‘선글라스맨’을 옆에 세워 놓고 언론에 자랑을 해 세계 정보기관의 웃음거리가 됐다. 역시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둔 서투른 언론 플레이였다.
“과장도 못될 사람이 원장됐다”
그는 지난달 출간한 회고록 때문에 국정원이 국정원직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해 4번째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있다. 많은 국정원 출신은 “과장도 못 될 사람이 조직의 장에 올라 온갖 망신을 다 시키고 있다” “김정일 앞에 고개를 숙여 북이 국정원을 얕보게 했다”고 울분을 토한다. 후배들의 원성이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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