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그(윤영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펴낸 책 ‘외교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와 25년간 몸담은 대학을 떠나는 소회를 들을 작정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김정은의 4차 핵실험(6일) 다음 날이라 대화의 대부분은 북한 이슈에 집중됐다. 윤 교수는 “기존의 대북 정책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야 할 중대한 사건”이라고 했다. 》
대북 정책 틀 바꿀 4차 핵실험
―왜 그런가.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김정일만 해도 예측 가능했는데 김정은은 자신이 선택한 결과에 따른 국제적인 파장 같은 종합적 사고를 하고나 있는지 근본적 의문이 든다. 행동도 예측 불가능하지만 일을 벌이고 난 뒤 뒷감당도 잘할 것 같지 않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리더십이 공고해지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자꾸 저런 식으로 도발하면 국제사회가 가만있을 수 있겠나. 아무리 국제사회가 힘이 없다 해도 압력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과연 언제까지 북한이 그런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김정은의 리더십이 공고해지기보다는 지속적인 시장화(市場化)의 결과 주민 의식이 바뀌면서 국내적으로는 사회 체제의 성격 자체가 변하고 있다고 본다. 지지 기반이 확고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중국이 이번엔 좀 변할까.
“중국 사람들 만날 때마다 북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하면 자기네들이 미칠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생각으로는 중국이 당장 무역 거래나 석유 원조를 끊어 주었으면 싶은데….
“그럴 경우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한반도 급변 사태다. 하지만 나는 당장 급변 사태까지 가지 않더라도 북한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중간 지대가 있다고 본다.”
그의 말은 급변 사태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북한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수위의 제재도 있는데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시진핑 주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자신의 임기 시작 때부터 골치 아픈 존재가 북한 아니었나. 핵은 안 된다는 것도 명확히 해 과거 어떤 중국 지도자보다도 결연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여태까지 김정은 초청도 안 했다. 한마디로 벌을 주는 형태로 북한을 관리해 왔는데 또다시 정면 도전을 받은 셈이 됐다.”
―그러니까 중국이 변할 것 같은가.
“북한이 계속 이렇게 빌미를 만드는 상황에서 중국이 평가하는 북한이라는 전략적 가치가 전략적 부담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나는 미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과 같은 미중 공조의 기회가 없었으니 중국과 협력해서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펴라고 조언했는데 그때마다 “(미국은) 그동안 너무 당해서 (북한에 대한) 흥미를 끊었다”라고 말하더라.”
―좀 무책임하게 들린다(웃음). 결국 이번 사태로 미국의 대북 정책도 실패로 드러난 거 아닌가.
“그건 공화 민주 정치권은 물론 싱크탱크까지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의 대북 정책이라는 것은 비핵화로 압박한 다음 그게 작동이 안 되면 경제 제재를 한다는 매우 간단한 방식이었다. 알다시피 효과가 없었다.”
―왜인가?
“북한이 서방과 경제 거래 자체가 아예 없는데 아무리 제재를 한들 무슨 소용인가. 이란이나 리비아만 해도 제재가 작동한 것은 석유 판매 등 서방 경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가능했던 거다.”
―어쩌면 매우 간단한 논리인데 왜 (북한과의 경제 교류가) 이뤄지지 못했을까.
“의회 때문이다. 어떻게 저런 나쁜 정권(북한)과 거래를 하느냐, 무조건 압박을 넣어야 한다고 하는 논리가 미 의회를 장악했다.” 타이밍 놓친 대북 이니셔티브
―미국도 중국도 소극적인 상황에서 북핵 문제는 결국 ‘우리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맞다. 미국은 북한의 ‘북’ 자도 듣기 싫어하는 상황이고 중국은 현재 북한 상황을 만든 것은 미국이라고 비난한다. 한마디로 동북아 핵 리더십은 공백 상태다.”
윤 교수는 이 대목에서 “어떻게 보면 한국이 이니셔티브(외교적 주도권)를 쥘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말한 통일 대박이나 신뢰 프로세스도 이런 차원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질적 성과는 없었다”며 비관적인 전망을 덧붙였다.
“지난 3년간 북한과의 경제적 연결 고리를 심화시키고 북한 경제를 한국이 품어 안는, 그래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물적 인적 교류를 심화해 북한의 대남 의존도를 높이는 실질적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친 거 아닌가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새해 들어 모처럼 화해 분위기가 생길 것 같았는데 평화니 화해니 하는 말은 꺼내기조차 힘든 상황이 됐다. 타이밍이란 게 그래서 중요한 거다. 이번에도 과거 핵실험 때와 비슷한 패턴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남한도 이참에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만약 우리까지 핵을 갖겠다고 나선다면 국제적인 대북 공조 연대와 관련해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남한의 핵무장이 북한의 비핵화를 이끄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과연 미국에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어야 한다는 건가.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고, 그 이듬해 2월 29일 열린 제3차 미북 고위급회담에서 합의한 2·29합의가 일종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북한의 핵 활동 중단과 미국의 대북 식량 지원을 맞바꾸겠다는 합의였지만 북한이 합의 보름 만에 장거리 미사일 발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다. 어떻든 한국은 국제사회의 연대에 기반한 강한 제재를 통해 북한의 핵 관련 조치를 끌어내고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공백 상태인 대북 정책의 리더십을 한국이 채워 나갈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본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윤 교수와 기자는 약간씩 지쳐 갔다. 도무지 상식과 합리가 통하지 않는 북한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화제를 그의 전공인 ‘외교’로 돌렸다.
―박 대통령이 내치(內治)보다 외교를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통령 외교 정책 3년을 평가해 본다면….
“뭘 하겠다는 구호는 있었지만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과 실천은 미약했다고 본다.”
―실행 파일은 장관이 만드는 것 아닌가.
윤 교수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하긴 전직 장관 입장에서 현직을 비판하기는 어려우리란 생각에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협상은 어떻게 보나.
“나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자 관계로 국한시키지 말고 글로벌 인권, 전시(戰時) 여성 인권 문제 같은 글로벌 이슈로 끌고 가야 한다고 말해 왔다. 정상회담은 그대로 진행하면서 중장기적인 국제 여론전으로 끌고 갔어야 했는데 양자 문제로 국한시키며 일본과 일절 대화를 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산은 일본이 우리에게 못된 짓을 했고 우리는 피해자라는 ‘도덕적 우위’다. 그런데 돈 문제와 매치되면서 도덕적 우위를 잃어버렸다. ‘불가역적(不可逆的)’이란 말이 왜 가해국인 일본에서 나오나, 이게 진정 어린 사과이고 행동인가.”
차분했던 그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기자도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책 이야기를 꺼냈다.
―왜 지금이 ‘외교의 시대’인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국제 질서가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의 힘이 약화됐고 중국이 공세적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국민의 위기의식을 활용하는 아베 리더십이 등장했다. 여기에 김정은까지 부상해 불안정성이 증가하는 상황이다. 우리 외교가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새 질서에 필요한 ‘중첩 외교’론
―그런 상황에서 한국 외교의 좌표는….
“‘고래 싸움 속 새우 신세’라는 의식을 하루빨리 떨쳐 버리고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우리가 쥐어야 하고 쥘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한 때다. 사실 한국 역사에서 이렇게 주도적이고 전략적인 외교를 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조성된 적이 처음이다. 한마디로 이렇게 잘살았던 적이 없었다. 이런 국력을 바탕으로 외교 역량이 커져야 할 시점이다.”
그는 이어 “한국 외교의 궁극적 목표는 ‘통일’”이라고 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는 가능하다면 한반도가 이대로 분단 상태를 유지하기를 원하지 통일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통일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이 원심력을 약화시키는 외교, 통일이 되어도 주변국에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이득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외교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내놓은 개념이 ‘중첩 외교’였다.
“균형 외교라고 하면 미중 사이의 적당한 지점에서 눈치를 보는 소극적 전략이라 맘에 안 든다.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고르라는 프레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프레임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한미는 동맹이지만 이번에도 보았다시피 북한 문제에 대해 우선순위를 보는 편차가 있다. 중국도 우리에겐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복잡한 처지는 지금 동남아의 많은 나라가 똑같다. 영국 프랑스도 미국과 동맹국이지만 중국과 가까워지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나. 발상을 적극적으로 해 나갈 필요가 있다.”
―결국 외교도 상상력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맞다. 매사를 문제 해결 중심으로 생각해야지 이념을 잣대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제일 큰 문제다. 그런 점에서 야당의 (동방) 정책까지 과감하게 포용하면서 통일을 위한 초당적 리더십을 발휘했던 독일의 리더십이 결국 통일을 불러왔던 일을 상기했으면 한다.”
너무 진지했던 분위기도 풀 겸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2014년 3월 김한길 안철수 의원이 공동대표로 이끌던 새정치민주연합의 정강정책을 만든 것으로 아는데….
“현실 정치를 바꾸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당시 안 대표 쪽에서 제안이 와 참여했다. 하지만 정치는 투입 에너지에 비해 결과가 작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망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의 일은 역시 읽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을 절감했던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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