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정은 승용차 추월했던 사단장의 운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2일 03시 00분


2013년 5월 평양 미림승마장 공사 현장을 방문한 김정은이 군 관계자들을 질책하고 있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자기 말을 무시했다며 수시로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DB
2013년 5월 평양 미림승마장 공사 현장을 방문한 김정은이 군 관계자들을 질책하고 있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자기 말을 무시했다며 수시로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와, 도로가 끝내주는데…. 밟아라, 밟아.”

2010년 초 북한군 총정치국 회의 참석차 평양에 오던 황해도 주둔 4군단 산하 모 사단장은 기분이 한껏 들떴다.

개성∼평양 고속도로의 평양 쪽 관문인 ‘조국 통일 3대헌장기념탑’ 근처에 오니 시내까지 쭉 뻗은 넓은 도로가 펼쳐졌다. 운전병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팔라딘’의 액셀을 힘껏 밟았다. 2007년 북한은 일본 닛산과 중국이 합작으로 설립한 ‘정저우 닛산’에서 이 차를 300여 대 구매해 사단장과 사단 정치위원들에게 주었다.



6단 자동변속기에 배기량 3275cc인 팔라딘은 당시 북한에선 보기 드문 최신 승용차였다. 이런 차를 먼지가 풀풀 나고 울퉁불퉁한 시골에서 몰고 다니다 모처럼 평양의 넓은 아스팔트에 들어서니 질주 본능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

마침 밤이라 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이들은 앞차를 마구 앞지르며 질주했다.

그런데 추월당한 한 고급 차가 갑자기 가속해 팔라딘을 재차 추월한 뒤 앞길을 막고 정지했다. 무려 벤츠600이었다. 북한에서 벤츠는 노동당 간부들만 탄다. 한국에서는 장관급인 노동당 비서의 관용차가 벤츠280임은 웬만한 사람은 안다. 그런데 무려 600이라니 사단장과 운전병은 기가 질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멈춰 선 벤츠 창문이 열리더니 새파란 젊은이가 얼굴을 쑥 내밀고 차를 째려보았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열린 총정치국 회의에선 그 사단장과 운전병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벤츠600을 직접 운전했던 김정은에게 걸려 이들이 처벌을 받았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얼마 뒤 김정은을 열 받게 만드는 일이 또 있었다. 평양에서 원산으로 가는 도중 마식령을 관통하는 길이 4km의 ‘무지개 동굴’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터널은 좁고 긴 데다 환풍 장치도 제대로 없어 평소 매연으로 꽉 찬다. 이곳에서 김정은 앞으로 매연을 새까맣게 내뿜으며 북한군 화물차가 느릿느릿 달렸는데 비키라고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선군정치를 앞세우던 당시 북한에서 군 차량은 교통경찰도 단속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마 운전병은 차종이 구별되지 않는 민간 승용차가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니 “감히 군대 차량에게”라는 심정으로 더 천천히 갔을지도 모른다.

김정은은 분노했다. 2010년 5월 5일 군에는 ‘청년대장 동지 방침’이란 것이 하달됐다. 당시 김정은은 후계자 신분이었음에도 직접 자기 이름으로 지시를 하달한 것이다.

‘5월 5일 방침’으로 불리는 이 지시에는 “요새 군 운전사들이 무법천지이니 강하게 단속해 엄중히 책임을 물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때부터 북한군 경무원(헌병)들은 교통질서를 어기는 장성들의 차를 직위에 상관없이 단속했다. 예외는 없었다. 인민무력부장도 단속되면 청사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내 운동장에서 운전병과 함께 2시간 넘게 제식훈련을 해야 할 정도였다.

‘금수저’만 될 수 있는 장성 운전병들은 시장에서 산 맵시 나는 군복과 비싼 내의를 입고 살다가 이때부터 후줄근한 북한군 면내의를 입고 다녀야 했다. 병사들 속에선 “청년대장이 참 쪼잔하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청년대장은 난폭 운전만 못 견딘 것이 아니었다. 김정은은 후계자 신분일 때 예고 없이 군 관련 시설을 시찰했다. 김정일은 몇 달 준비한 세트장에 가서 안내해주는 동선을 따라 쭉 본 뒤 사진을 찍고 돌아갔지만, 김정은은 뒷마당에도 불쑥 들어가 담배꽁초가 많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때마다 내로라하는 간부들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쓰느라 난리가 났다.

2012년 5월 김정은이 평양 만경대 유희장을 방문해 보도블록의 잡초를 직접 뽑으면서 “설비의 갱신은 몰라도 손이 있으면서 잡풀을 왜 뽑지 못하는가. 한심하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는 소식이 북한 매체들에 실렸다. 북한 매체에서 지도자가 화를 내는 것을 보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기강을 세우려고 일부러 공개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저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원래 김정은은 무시당하는 것과 더러운 것을 못 참는 성격인 것 같다.

하지만 자기 맘대로 성질을 부릴 수 있는 국내와 달리 국제무대에서 김정은은 철저히 ‘왕따’ 신세로 무시당해왔다. 압박하면 할수록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무시당하는 데 대한 반발일 수도 있다.

우리는 보수 정권 내내 김정은을 별로 상대해 본 일이 없고 성격 같은 건 몰라도 됐다. 하지만 앞으론 다르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과의 대화를 위해 햇볕정책 시기 남북 협상의 주역들을 요직에 중용했다. 그런데 과거 협상 경험이 얼마나 유효할진 모르겠다. 어쩐지 김정은은 김정일보다 말을 트기가 훨씬 까다로울 것 같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김정은#청년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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