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의 모바일 칼럼]자사고는 과연 보수의 전유물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7일 03시 01분


이진 논설위원
이진 논설위원
결국 자사고 학부모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자사고학부모연합회’ 회원 2000여명(주최 측 추산)은 26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자사고 폐지정책을 철회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서울시교육청을 향해 행진도 했다. 서울의 일부 자사고 교장들도 집회에 나와 학부모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날 자사고 학부모들의 실력행사는 서울시교육청이 이달 중순 관내 자사고 외고 29곳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던 것이 발단이었다.

자사고 외고 국제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다. 하지만 교육부 장관이 아직 임명되지 않아 중앙정부는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그러자 진보 교육감들이 먼저 전환을 주장하고 나섰다. 서울시교육청에 앞서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가장 먼저 자사고 외고 폐지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진보 대통령과 진보 교육감들이 ‘자사고 죽이기’에 나선 것이다. 자사고와 진보는 물과 기름의 관계일까?

자사고의 조상(祖上)은 ‘자립형 사립고’였다. 2001년부터 민족사관고등학교 포항제철고 광양제철고 등이 시범학교로 지정됐다. 이 시기는 진보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던 때였다. 고교를 평준화의 족쇄에서 풀어줘 교육과정을 다양하게 만들고 학생과 학부모에게 더 넓은 선택권을 주자는 취지였다. 이런 기조는 그 다음 진보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자립형 사립고의 수명이 길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가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재단의 넉넉한 지원과 우수 학생 유치로 이들 고교가 지역 명문으로 자리 잡을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뒤이은 보수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은 자립형 사립고의 문턱을 낮춘 자율형 사립고를 도입했다. 2012년까지 모두 51곳을 지정했다. 자사고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역시 보수인 박근혜 대통령도 자사고 정책을 유지했다. 그 사이 일부 자사고가 자진 철회하는 등의 결과로 현재 전국에 자사고는 46곳, 외고는 31곳이 있다. 진보 보수라는 정파에 상관없이 자사고를 육성하자는데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균열이 찾아왔다.

2014년 교육감 선거 때 진보진영은 자사고를 ‘교육 불평등’ ‘고교 서열화’의 원흉으로 지목했다. 2010년에도 일부 교육감이 자사고 지정 취소에 나섰지만 찻잔 속 태풍으로 그쳤다. 하지만 자사고 23곳이 몰려 있는 서울의 교육감이 자사고 폐지를 밀어붙이자 파급력은 엄청났다. 정부가 교육감의 자사고 지정 취소 권한을 빼앗아 교육부 장관에게 넘겼다. 자사고를 놓고 진보는 폐지, 보수는 유지의 갈등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26일 공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도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지지자들은 자사고 폐지를, 자유한국당 지지층은 자사고 유지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일반고 교육역량 강화방안’을 발표하면서 지정 목적을 어기는 자사고는 일반고로 전환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입시 위주 교육이나 선행교육 실시, 입시 비리, 재단전입금 미납 등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런데 이듬해 서울시교육감이 같은 잣대로 몇몇 자사고를 탈락시키려 하자 정반대로 방향을 틀었다. 자사고가 정파 간 싸움의 올가미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보수건 진보건 자사고 설립 취지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뒤떨어진 일반고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했더라면 지금 같은 일제단속 식 정책 전환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자사고를 일시에 없앤다는 것은 정상적인 교육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가장 큰 피해는 자사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입게 됐다. 그렇다고 일반고 수준이 금세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사회 전체의 불신과 갈등이 커지게 돼 무엇보다 걱정스럽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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