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취임사가 요즘 부동산업계에서 화제다. 김 장관이 취임사를 통해 사실상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다주택자에 대한 강한 규제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특히 김 장관의 취임사가 주목을 받은 건 투기 과열의 근거로 제시한 ‘숫자’ 때문이다.
김 장관은 지난해 5월과 올해 5월의 주택거래량을 비교하며 서울 강남4구(강남, 서초, 송파, 강동구)에서 5주택 이상 소유자의 거래량은 53.1%, 29세 이하는 54% 늘었다고 설명했다. 집을 여러 채 소유한 부자들과 부잣집 자제들로 추정되는 29세 이하의 투기 수요가 시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는 뜻도 내비쳤다.
‘증가율’만 따지면 김 장관의 지적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숫자의 해석과 인용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김 장관이 언급한 그룹의 거래량은 강남4구 총거래량 3904건 중 극히 일부다. 5주택 이상 소유자의 거래량(98채)은 2.5%에 불과하다. 29세 이하의 거래량(134채)도 마찬가지다. 절대적인 거래량이 적다 보니 조금만 수치가 늘어도 증가율이 커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을 갖고 있다.
이런 점이 꼬투리가 돼 김 장관이 전체 거래량의 일부를 침소봉대해 투기 수요를 과장했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부동산투자 전문가 A 씨는 “장관이 부동산업계 전체를 적폐로 보는 것 같다”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대형 건설사의 임원 B 씨는 “정권 초에 정부가 엄포를 놓을 순 있지만 시장을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우려했다.
논란이 거듭되면서 투기와 투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이냐는, 한마디로 결론 내기 쉽지 않은 문제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김 장관의 바람과는 달리 대다수의 반응은 다주택자의 거래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모두 ‘투기꾼’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 정부가 단속하고 관리해야 할 부문은 세금을 탈루하거나 불법전매를 일삼는 말 그대로 불법적인 투기세력인데 법이 정한 테두리에서 이뤄지는 투자자까지 겁박하는 건 문제라고 항변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김 장관이 제시한 숫자를 두고 갑론을박만 할 게 아니라 큰 메시지를 봐야 한다는 반박도 나온다. 이들은 ‘6·19부동산대책’ 이후 나온 김 장관의 취임사는 임대주택 등록 활성화를 위한 포석이라고 설명했다. 다주택자를 마냥 ‘투기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식 사업자로 등록시켜 양지로 끌어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선 주택 공급만큼이나 다주택자가 내놓는 임대주택이 원활하게 공급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도 김 장관의 숫자에 허점이 있었고, 이게 빌미가 돼 논란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부동산 시장은 ‘숫자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같은 수치나 통계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면 전혀 다른 진단이 나온다. 주택 공급이 충분한 것이냐를 두고도 정부와 시장은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경우가 왕왕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제대로 숫자를 읽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김 장관도 취임사에서 이를 제대로 짚었다. “숫자로 현실을 왜곡하지 맙시다. 현장과 괴리된 통계는 정부에 대한 불신만 키웁니다. 현장에서, 국민의 체감도를 가지고 얘기합시다.” 김 장관이 앞으로 이 말을 잘 지켜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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