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관악구 봉천6동(행운동)의 ‘소천서사(少泉書舍)’.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36년 동안 살아온 집이다. 장맛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조그마한 정원의 나무들이 싱그러운 빛깔을 띠었다. 조 전 부총리는 “대문 앞의 소나무는 수령이 한 45년쯤 됐을 것”이라며 “내가 직접 심었는데 무지무지 잘 큰다”고 말했다. 조 전 부총리는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과 국회의원, 민족문화추진위원회장까지 평생 정력적인 활동을 해왔다. 올해 구순을 맞은 그는 ‘관악산 산신령’ ‘판관 포청천’이란 별명답게 흰 눈썹이 더욱 희게 빛났다. 》
―구순을 맞으신 소감은….
“올해 우리나이로 아흔 살입니다. 제가 1928년생이니까 내년 2월에 만 90세가 돼요. 사실 제게 남겨진 날들이 이제 많지 않다는 걸 느낍니다. 구순을 앞두고 책을 쓰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나아져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가슴에 품고 사는 말은 ‘자성(自省)’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 여러 가지 과오가 많았잖아. 늙어가면서 계속해서 그걸 되풀이해서야 되겠어?’ 하루하루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반성하지요.” ―어떤 책을 쓰고 계신가요.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책입니다. 현대사회에는 자본주의도 민주주의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초고를 써놨는데 교정을 제대로 보려면 2, 3개월은 더 작업해야 할 것 같아요. 책을 완성할 시간이 제게 남아 있을지는 하늘에 맡겨야지요.”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제일 큰 것은 분배와 양극화의 문제입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자유주의식 자본주의하에서는 양극화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경제적인 소득의 양극화는 문화의 양극화를 불러오고, 결국 사회 전체가 내부에서 파열하게 됩니다. 양극화로 인해 공동체 의식이 해체되면서 민주주의의 위기도 불러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언론을 믿지 않는 것이 대표적 현상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만 해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과 같은 정통 미디어를 인정하지 않고 트위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공무원 늘리기는 일시적 대책”
―문재인 대통령의 이른바 ‘J노믹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까지 국민적 지지율도 높고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평가에만 너무 매달리지 말고 국민들이 만족 못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은 추진해야 합니다. 5년 동안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최저임금, 비정규직 문제 같은 각론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긴 안목 속에서 해결해야 할 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해야 합니다.”
―일자리를 위한 추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청년 실업이 심각한 상황에서 정부가 일자리 창출 대책을 세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세금으로 공무원을 뽑는 것은 가장 손쉬운 대책이긴 하지만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추경으로 공공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일시적이고 숫자상의 효과밖에 없습니다. 만약 실업 문제가 심각하면 내년에는 더 많은 공무원을 뽑을 건가요? 임기응변식 추경은 또다시 추경을 해야 할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자리를 늘리기 위한 좋은 정책은 무엇입니까.
“최종적으로 일자리 확대는 민간 부문이 해야 할 일이지 정부의 몫이 아닙니다. 전 정부에서 대기업을 동원했던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창업으로 연결이 안 되니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일자리 확대에서 가장 큰 것은 중소기업과 벤처 창업입니다. 그런데 기술이 있어도 창업으로 이어지지 않으니 정부가 나서서 창업을 돕는 채널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선 ‘창업’이란 말을 신문에서 아예 찾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해외에서 공부 마치고 귀국한 학생들이 대부분 창업을 합니다. 중국에서는 2014∼2015년 하루에 1만 개씩 1년에 365만 개의 기업이 창업됐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청년들이 공무원 시험에 수십만 명이 몰린다고 하니 정상이 아니지요.”
―최저임금 1만 원, 비정규직 철폐 등을 놓고 민노총이 대규모 거리행진을 하고, 반면 기업에서는 상황이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는데요.
“대통령도, 국민도, 노조도 너무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해결하려 하면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새 대통령에게도 특효약은 없습니다. 대통령이 능력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상황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정부가 한쪽 방향으로 강요해선 안 됩니다. 기업은 기업가에게,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겨야 합니다.”
―재벌 개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학생 시절부터 참여연대에서 활동하던 모습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가 명석한 분이라 큰 무리를 할 분이 아닙니다. 재벌 개혁은 대기업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한국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야 합니다. 대기업은 돈 있고, 사람 있으니 두부 장사도, 빵 장사도 물론 잘할 수 있겠죠. 그러나 재벌은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하기보다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한국 경제학계 1세대 대표주자인 조 전 부총리는 1960년대 미국 유학 후 서울대 상대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박세일 전 서울대 교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등 제자들이 ‘조순학파’를 형성하기도 했다.
―‘조순학파’란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순학파란 없습니다. 나를 따르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온 말 같아요. 그러나 나는 그런 학파를 만든 적이 없어요. 나는 항상 개인일 뿐이고, 사람은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나보다 훨씬 머리 좋은 학생들도 많았고, 그분들이 공부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똑같을 필요도 없고, 내 것을 본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경제학은 사실 먹고사는 문제일 뿐 높은 수준의 학문은 아니다”라며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사람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키운 사람을 어떻게 쓸 것이냐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교육의 목적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교육은 완전히 역행하고 있어요.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가 무섭게 영어, 속셈, 피아노 배우느라 정신을 못 차려요. 나중에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아이를 낳지도 못합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성취동기’를 키울 기회가 없다 보니 창업보다 공무원 시험밖에 생각을 못 해요. 교육은 나라를 이끌어갈 엘리트 그룹을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엘리트 그룹이란 무엇인가요.
“이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과 도덕성,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또한 실제로 그런 일을 하고 존경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교육제도하에서는 엘리트 그룹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서울대를 졸업한 학생이나 지방대를 나온 학생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학교 교육을 어떻게 바꿔야 하나요.
“교육부가 학교 교육에 간섭을 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평준화와 대학입시 통제가 문제입니다. 수능 성적이 0.5포인트 높고 낮은 것으로 경쟁하는 그런 유치한 짓 좀 하지 맙시다. 만점을 맞아도 낙방하는 시험이 어디에 있습니까. 잘하는 자사고가 있으면 좀 더 잘하라고 격려해야지 왜 없애려 합니까. 모든 학교가 똑같으면 획일화된 인재밖에 길러낼 수 없습니다.”
“잘하는 자사고 왜 없애려 하나”
조 전 부총리는 대입시험의 ‘지역별 쿼터제’를 “우리 사회의 중앙집권화와 양극화, 부동산 투기 등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정책이 될 제안”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의 주요 대학들이 서울, 부산, 강원, 전라, 인천 등등 지역별로 쿼터제를 두고 지역별로 경쟁해 우수한 인재를 뽑는 겁니다. 강원도 시골 학교에서 자란 학생이 서울 강남에서 사교육받은 학생보다 학습 능력이 떨어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미국의 대학들은 이미 전국적으로 지역별 쿼터제에 맞춰 뽑습니다. 대학의 입학처장은 매년 전국을 돌면서 우수 학생을 유치하지요. 교육 문제에 있어서 과거의 도그마에 갇혀 있지 말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히 실천해야 합니다.”
조 전 부총리는 어릴 적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논어 맹자 등도 일찌감치 터득했다. 그는 “한글 전용으로는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를 알 수가 없어서 제대로 된 인재 교육을 할 수 없다”며 한자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어릴 적에 부친에게 배운 가르침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소학(小學)’에는 인생에서 지켜야 할 것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근면할 근(勤), 둘째는 화목할 화(和), 셋째가 핵심입니다. 바로 느릴 완(緩)입니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아이들보고 자꾸 빨리 공부해라, 빨리 출세해라, 빨리 돈 벌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 좀 그만두었으면 좋겠어요.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도 손자에게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면 몇 발자국 못 간다. 천천히 힘을 길러가면서 짐을 지고 가라’고 이야기해 줬습니다. 살아보니 인생은 짧고도 긴 것입니다.”
조 전 부총리는 인터뷰를 마치며 아흔을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직접 쓴 ‘노회(老懷)’라는 제목의 한시(漢詩)를 들려주었다.
‘평생의 내 구상 아주 공허한 것은 아냐(平生構想未全空)/운에 따라 작은 기회에 우연히 적중한 것도 있다네(隨運微機遇適中)/구십을 바라보며 몸은 늙어도 본성은 그대로 남아(望九老身留本性)/해가 가도 하루 일과는 젊을 때와 같구나(年重日課少時同)’
::조순은:: △1928년 강릉 출생 △서울대 졸업,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제학 박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88∼1990년), 한국은행 총재(1992∼1993년) △초대 민선 서울시장(1995년), 제15대 국회의원 △민족문화추진회(현 고전번역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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