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성호]교통사고처리특례법 폐지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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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사회부 차장
이성호 사회부 차장
“일단 드러누워.”

한국 운전자들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흔히 듣는 ‘조언’이다. 머리 깨지고 뼈 부러지는 사고가 아니다. 아픈 것도 같고 멀쩡한 것도 같은, 그런 사고 때 듣는 말이다. 초보 시절만 해도 운전자들은 ‘이래도 되나’라며 망설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제 발로 병원을 찾는다. 병원 침대에 드러누운 이들의 속내는 딱 하나다. “어차피 보험사 돈인데….”

반대로 교통사고를 냈을 때도 마찬가지다. 한국 운전자들은 자신의 과실로 발생한 교통사고 앞에서 유난히 당당하다. 누가 봐도 가해자인데 일단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내 탓이 드러나도 별로 미안해하지 않는다. 가벼운 접촉사고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죽을 정도 아니면 상대방이 다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가족과 지인 중에 가해 운전자의 사과 방문은커녕 전화 한 통 못 받아 본 경우도 다반사다. 사고 낸 운전자들의 속내는 모두 같다. “어차피 보험사가 처리할 텐데….”

교통사고 가해자들이 보험만 내세우면 전자와 같이 애매한 ‘나이롱환자’를 양산한다. 나이롱환자이길 선택하는 피해자가 많아질수록 가해자들은 점점 더 보험에 매달린다. 악순환이다. 대한민국 도로가 하이에나 우글거리는 정글로 변한 가장 큰 이유다.

주범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교특법)이다. 1981년 만들어져 이듬해부터 시행됐다. 요지는 이렇다. 교통사고 가해자가 손해배상금 전액을 보상하는 보험 또는 공제에 가입했으면 처벌하지 않는 것이다. 단, 사고 원인이 가해자의 신호위반 무면허운전 등 중대한 과실 8개에 해당되면 처벌이 가능하다. 그동안 몇 차례 개정으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위반 등이 더해져 11개가 됐고 차량 낙하물이 추가돼 올해 말 12개로 늘어난다.

그럴듯한 이유에 예외조항까지 뒀지만 결국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전무죄를 합법화한 셈이다. 물론 모든 교통사고 가해자를 전과자로 만들 순 없다. 가벼운 접촉사고로 경찰 검찰 법원을 쫓아다닌다면 그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을 것이다. 하지만 40년 가까이 지나면서 교특법의 적폐는 이런 긍정적 효과를 덮었다.

언제부턴가 평범한 운전자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헐크로 변하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죄 지은 사람들이 당연한 듯 큰소리친다. 수사기관은 “어지간하면 보험 처리 하시죠”라며 유전무죄 확립에 일조한다. 2015년 보험사 접수 교통사고는 114만 건인데, 경찰에 접수된 사고는 고작 23만 건인 이유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진짜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이다. 아홉 살 어린이에게 전치 16주의 부상과 후유장애까지 안긴 한 운전자는 보험에 가입했고 중상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헌법재판소가 이를 바로잡아 뒤늦게 지난달 처벌이 이뤄졌다. 만약 헌재 결정이 없었다면 피해 어린이와 가족은 가해자의 사과도 못 받고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경찰에 접수되지 않거나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은 교통사고 중 이런 경우가 또 없지 않을 것이다.

교특법은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경제 활성화에 무게를 두고 만든 법이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규모 모두 지금과 비교할 수 없다. 이제 교특법의 수명은 다했다고 본다. 어쩌면 교특법 폐지가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물질만능주의와 인명경시 풍조를 해결할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교통사고처리특례법 폐지#교통사고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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