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라면 인물이나 대상을 가늘고 길게 표현한 조각가라고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나 역시 그랬고 특히 문장 쓰기에 관해서는 그의 조각같이 불필요한 수식이나 군더더기 없이 쓰고 싶어 했다. 작고한 소설가 한 분이 언젠가 사석에서 소설에서의 문장은 목수가 나무를 매만지듯 그렇게 대패처럼 다듬어 써야 하는 거라고 조언해주었을 때 나는 자동적으로 자코메티의 뼈대만 남긴 듯한 조각을 떠올렸다.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열리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를 보러 요즘 머물고 있는 도시의 미술관에 갔다. 조각, 판화 등으로 나뉜 열여섯 개의 섹션 중 대표작인 ‘걷는 남자’를 볼 수 있는 공간에 관람객이 가장 많았다. 고뇌하는 듯 보이는, 작은 머리에 거대한 발을 가진 대형 청동 조각 앞에 서 있으려니 “현실의 인간상과 가장 가까운 것을 만들려고 한 결과 가늘고 긴 작품으로 제작되었다”라는 자코메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 마음을 뒤흔들어 버린 작품은 따로 있었다.
좋아하는 시 중에 이렇게 시작하는 작품이 있다. “여기 사과가 놓여 있었고, 여기 책상이 있었다. 이것은 집이었고 이것은 도시였다. 여기 육지가 잠들어 있다.” 제목은 ‘사과에 대한 만가’. 이 짧은 시에서 ‘대체 사과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잔의 사과 그림을 실물로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그것은 사과 이상의 어떤 것, 삶이라든가 인생, 뭐 이런 추상적이고 말하기 힘든 것을 정물로 표현해 놓은 듯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다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과란 무엇인가.
그날 마음에 새기고 온 자코메티의 작품은 사과에 관한 두 점의 정물화였다. 세잔의 영향을 받아서 그린 ‘사과가 있는 정물’과 그 8년 전에 그린 ‘사과 습작(Study of Apples)’. 예의 조각들처럼 군더더기 없고 정지해 있으되 어떤 움직임을 갖고 있는 사과들. 사과 한 알을 그리기 위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 그야말로 습작의 과정을 한 장에 보여주고 있었다. 완벽한 구도나 완성도보다는 ‘사과’를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창조하려고 한 것인가 하는 과정을. 개인적으로 나는 습작, 연습 같은 말들을 좋아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욕망에 관해서라면 끊임없이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자코메티의 작은 사과 그림 앞에서 다시 그 생각할 거리를 마주친 듯하다. 사과란 무엇인가,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사과는 과일이다. 아닐 때도 있다. 사과는 정물(靜物)이며 어떤 이에게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둥근 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숙소로 돌아와 책을 펼쳤더니 이런 문장부터 눈에 들어온다. “뭘 더 생각할까!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살았고 살아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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