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어느 날, 일본 교토(京都)의 산조(三條) 뒷골목 골동거리. 길을 걷던 30대 재일동포 사업가가 한 진열장 앞에 멈춰 섰다. 뽀얀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였다. 그는 넋을 잃었다. 보면 볼수록 떠나온 고향이 떠올랐다.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200만 엔. 당시 집 두 채 값 정도였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지만 머뭇거리고 말고 할 일이 아니었다. 1년 할부로 달항아리를 손에 넣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간 정조문(1918∼1989). 가세는 기울어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정조문은 일본에서 부두 노동자로 막일을 하면서 지냈다. 성인이 되면서 사업을 시작했고 조금씩 돈을 모았다. 그럴수록 고향은 더욱 그리워졌다.
백자 달항아리와의 우연한 만남 이후, 정조문은 일본에 유출된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도자기 회화 불상 금속공예품 목공예품 민속품 석조물…. 고려 석탑이 고베(神戶) 지역 논바닥에 부서져 뒹구는 것을 보곤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아예 논을 통째로 사들이기도 했다. 유물 수집에 그치지 않았다. 1972년부터 재일 사학자들과 함께 답사단을 만들어 일본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한국 문화유적을 답사했다.
그는 그렇게 우리 문화재 1700여 점을 모았다. 1988년 교토 북쪽 시치쿠(紫竹) 지역의 한적한 주택가에 고려미술관을 세웠다. 다른 재일동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다. 이곳은 해외에서 한국의 문화재만을 전시하는 유일한 박물관이다. 고려미술관 입구 좌우엔 당당한 무인석 한 쌍이 떡 버티고 있다. 그 당당함은 정조문의 자존심이었다.
정조문의 외손녀는 이렇게 기억한다. “외할아버지는 늘 청자와 백자를 쓰다듬으셨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한 것이었지요. 일본에 끌려온 조선 도공들의 얘기도 많이 하셨어요.”
교토의 고려미술관은 아담하고 깨끗하다. 정조문을 매료시킨 백자 달항아리 같다. 커다란 옹기들을 전시해놓은 발코니는 특히 더 정감이 넘친다. 정조문의 삶과 컬렉션은 2000년대 들어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2014년엔 ‘정조문의 항아리’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정조문과 재일동포들은 식민지와 분단, 그 수난의 시대를 견뎌야 했다. 그들의 그리움이 가득한 곳, 고려미술관. 이제 교토에 가면 꼭 한번 들러야 할 코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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