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생 동안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찾을 의향이 전혀 없다. 그런데 정부가 내가 낸 세금으로 예술에 지원하는 것이 타당한가?” 누군가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묻는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정부가 예술에 왜 지원을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또 어떻게 지원하는지도 말해주어야 한다. 우선 예술이 우리 삶에 왜 필요한가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예술을 통한 심리적·정신적 효과이다. 시 한 편을 읽거나 영화 한 편을 보면서 팍팍한 일상에 지친 삶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고, 그런 심리적 치유와 재충전을 통해 다시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예술 수준이 향상되면, 국민이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되고 공동체적 일체감도 이룰 수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고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게 될 때, 국민이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되고, 행사의 성공을 위해 내부적 일체감도 이루게 될 것이며, 그때의 일체감이 사회의 다른 분야로까지 확산되고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화가 난 사람을 진정시키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준비한 또 하나의 대답이 예술을 통한 경제적 파급 효과다. 예술이 활성화되고 발전되면 그 효과가 경제에도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공연장이 활기를 띠고 문화예술 행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인력이 더 필요하게 된다. 필요한 장비를 제작해주는 일들도 파생적으로 생길 것이며, 행사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업, 음식업, 기타 상점들도 활기를 띠게 되어 예술과 직접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혜택이 미치게 된다는 식이다.
이런 효과들이 현실이 되려면 문화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첫째, 문화예술의 다양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다양한 생각과 느낌의 예술 작품을 접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이를 위한 예술의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똑같은 현실이나 대상을 바라보며 예술가들이 저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적대시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할 문화와 예술에서만은 다양한 다름들이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살려내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그 자체로 보이고, 관객들의 판단에 맡겨 두어 문화예술계가 스스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리로 해석하고, 미술 작품의 의미를 정치적 관점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물론 작품에 대한 해석이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과 선택의 문제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이런 다양성과 자율성을 목표로 예술을 지원해야 하며, 여기에 적합한 방법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예술 지원의 교과서적 규범 같은 이 원칙이 말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지원금이 국민의 세금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정부의 관점에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문화와 예술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정치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내용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술 지원이 정치의 논리, 더 정확히는 정치에 편승한 문화 권력의 편 가르기 논리에 따라 집행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술의 공공성보다 정치적 편의주의에 따라 예산이 집행되고,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나타난 사례가 문화계의 블랙리스트 사건일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문화기관이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말한다. 블랙리스트 의혹의 진상을 조사하고 제도개선위원회(가칭)를 만들겠다는 소식도 있다. 반가운 일이다. 이번 기회에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흐지부지 덮어버리고서는 새롭게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문화의 논리로 해결해야지, 정치적 논리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칫 또 다른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우려되어 하는 말이다. 이젠 내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냐고 묻는 누군가를 향해 당당하게 다양성과 자율성이 살아 숨 쉬는 문화공간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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