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란하다. 검은색 찍찍이가 달린 게 제일이라고 해서 샀는데…. 아무리 봐도 초등학교 시절, 축구를 좋아하던 노총각 선생님이 여름 캠프 날 신고 온 신발 같다. 내 옆을 스치던 여성분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친구에게 속삭였다. “야, 솔직히 이걸 5만 원 주고 사는 건 좀 아니지?” “당연하지.” 하지만 이게 올해 유행이라는 점원의 말에 그녀도 나도 흔들리고 말았다.
흰 양말에 검은색 스포츠 샌들을 신는 것, 근 20년 가까이 금기시해 온 조합이 요즘 다시 유행이다. 도대체 유행은 누가 만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만들 기회가 주어진다면 세계 평화를 위해 두 가지 패션을 유행시키고 싶다. 하나는 남성에게도 치마를 허하는 것.
여자는 치마와 바지 둘 다 입는데 왜 남자는 바지만 입어야 할까. 안 어울린다는 건 편견이다. 치마 입은 모습이 아주 깜찍한 남학생들을 나는 3주 전 뉴스에서 보았다. 영국의 한 중학교에서 불볕더위에도 반바지를 못 입게 하자, 남중생들이 치마를 입고 등교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성별에 갇힌 옷장이어야 하나. 패션계는 반성하라.
또 다른 하나는 여성에게도 겨털의 자유를 허하는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회가 남성에게 허용하는 딱 그만큼만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법으로 금한 것도 아니고, 알아서 안 깎으면 되잖아.” 하지만 나같이 멋진 여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제모를 안 하고 민소매를 입은 채 버스 손잡이를 잡는 건 상상만 해도 수치스럽다. 하지만 이 수치심은 민소매인 채 폴댄스 수업을 같이 듣는 A 군에게는 없어 보인다. 농구복을 입고 슛하는 사진을 SNS에 자주 올리는 B 군에게도 없어 보인다. 여성인 나만 느끼는 수치심. 나의 몸은 자연스러운 그 자체로는 불온한 것일까.
그러던 중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가 보낸 사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제모를 하지 않은 여성 여행자들의 모습이었다. 낯설었다. “여기선 아무도 신경 안 써. 머리카락처럼 매일 자라나는 게 털인걸.” 어쩌면 나는 하루 평균 30km를 걷는 방랑자의 모습에서도 여성은 눈썹이 정리되고, 다리가 매끈하며, 겨드랑이가 깨끗하길 기대했나 보다. 이게 다 ‘세상과 동떨어진 밀림 속 무적의 여전사’라는 설정에도 겨털만은 밀어야 했던 영화 ‘원더우먼’의 영향이다. 할리우드도 반성하라.
쓰다 보니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다. 여기저기 반성하라고 난리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를 반성하려고 한다. 동네 슈퍼에도 화장해야만 나갈 수 있다던 그녀에게 유난이라고 했던 나를 반성한다. 다이어트를 못 해서 모임에 못 나오겠다던 그녀에게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했던 나를 반성한다. 어떤 성별에겐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결함’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마르지 않은 몸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헤아리지 못했다. 나의 털이 ‘수치’가 된 여름에서야 깨닫는다. 이건 ‘뭐 어때’라는 정신 승리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여성의 겨털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사회를 꿈꾼다. 우주여행도 가능한 시대에 이런 사소한 생각도 불가능한 꿈으로 여겨진다면 정말 이상하지 않나.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사회에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영화 ‘러브픽션’에서 공효진은 겨털 안 미는 여자로 등장한다. 6년 전 일이다. 그녀의 털에 당혹감을 느끼지만, 이내 사과하고 털과 대화를 시작하는 하정우는 어쩌면 당신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팔을 들고 연습해보자. 낯선 것에 말을 건네는 연습을. 사실 이건 낯선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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