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면세점 시장 규모는 약 12조2000억 원이었다. 정부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 후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했지만 올해 역시 10조 원은 넉넉히 넘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대기업들이 치열한 사업권 쟁탈전을 벌였던 데는 이유가 있다.
관세청은 이런 산업을 구멍가게 수준만도 못하게 인식한 걸까. 11일 감사원이 발표한 ‘면세점 사업자 선정 추진 실태’ 결과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2015년 11월 이뤄진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특허권 심사는 감사원 발표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눈을 의심케 했다. 당시의 ‘심사’는 미리 정해 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면세점 특허권 심사가 이뤄지기 4개월 전 롯데그룹은 ‘형제 간 경영권 다툼’이라는 폭풍에 휘말렸다. 경영권 다툼은 폭로전 양상으로 번지면서 롯데는 순식간에 ‘비(非)호감 일본 기업’으로 전락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경영권을 지켰지만 ‘반(反)롯데 정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문제는 경영권 분쟁과는 무관한 면세점 사업에서 치명타를 입었다는 데 있다. 관세청의 평가 기준에는 오너 일가의 경영권 다툼이나 불투명한 그룹 지배구조가 감점 요인으로 명시돼 있지 않다. 관세청은 ‘독과점 구조 해소’를 주장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공문을 읽는 것으로 사실상의 심사 방향을 통보했다. 시장점유율이 60%가 넘는 롯데를 탈락시키라는 얘기였다. 지나치게 똑똑했던 심사위원들은 정부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그렇게 롯데는 월드타워점 특허권을 잃었다.
당시 심사 결과가 발표됐을 때 면세점업계에서는 “설마 했는데…”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롯데가 정부에 밉보여 철퇴를 맞았다는 추측이 파다했다. 두산이 대신 사업권을 따내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겸하고 있던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에 대한 정치적 배려라는 말까지 나왔다. 검찰 수사 결과로 드러날 일이지만 ‘롯데 퇴출론’이 사실로 드러난 만큼 두산은 따가운 눈초리를 한가득 받게 됐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밀어준 게 아니라면 두산은 부정심사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에 앞선 2015년 7월 신규 시내면세점 사업권 심사 또한 문제가 됐다. 그때 사업권을 따낸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의 주가는 관세청이 심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이미 상한가를 쳤다. 증권가를 중심으로 ‘한화 내정설’이 돌았던 배경이다. 감사원 감사 발표로 이런 소문들은 이제 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한화가 이로 인해 ‘사업권 취소’ 처분을 받는다면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은 롯데 이상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
현행법에 따르면 면세점 특허권은 여전히 5년마다 재승인을 받아야 한다. 수천억 원이 투자된 면세점의 운명을 5년에 한 번씩 정부에 맡겨야 한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직원들도 자칫 직장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젠 심사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기도 힘들어졌다. 정부에 잘못 보이면 사업을 잘해도 특허권을 뺏길 수 있다는 게 명백히 드러났으니 말이다. 2015년 롯데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번에는 신라도, 신세계도 타깃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신뢰를 잃은 관세청에 계속 면세점 특허권 관련 업무를 맡겨둬도 될는지 의문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아예 면세점 사업권을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바꾸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정부가 시장을 제대로 제어할 자격이 없다면 차라리 시장에 모든 걸 맡기는 편이 낫다. 그래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촌극이 반복되는 걸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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