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영]‘헌혈 절벽’ 시대가 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4일 03시 00분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대한적십자사 손일수 헌혈증진국장은 요즘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방학 휴가철이니 단체 헌혈에 참여하는 학교나 기업이 크게 줄어드는 탓도 있다. 간신히 적정 보유량(5일분)을 맞추고 있지만 하루만 삐끗해도 곧바로 비상이다. 전체 헌혈 인구 중 80%를 넘을 정도로 10대(만 16세 이상)와 20대가 헌혈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는 절대적이다. “할 수 있다면 나라도 매일 피를 뽑고 싶은 심정”이라는 손 국장의 하소연이 과장은 아닌 듯하다. 허나 그가 불안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고령화다.

헌혈로 얻을 수 있는 적혈구제제 사용률을 보면 61세 이상 고령층이 61.2%(2010∼2014년)를 차지한다. 51세 이상으로 범위를 넓히면 78%를 넘는다. 혈액 공급을 전담하는 10, 20대 비율은 갈수록 줄고 절대량을 써야 하는 고령층은 빠르게 늘고 있으니 인구 절벽에 이어 이젠 헌혈도 벼랑에 서 있는 셈이다. 막연한 불안이 아니다.

적십자사는 2018년 헌혈 필요량을 309만7790유닛(팩)으로 보고 있지만 부족량은 50만9108유닛에 달한다고 전망했다. 해가 갈수록 고령화가 심화하면서 혈액 부족량은 크게 늘어난다. 2022년에는 부족량이 87만 유닛을 넘는다는 게 적십자사의 공식 전망치다.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피가 모자라 수술대에 오르지 못하고 위태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적십자사는 헌혈 인구를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한 노력으로 몇 가지 기념품을 제공한다. 이런 방식은 선진국에선 쓰지 않기도 하거니와 이미 한계를 맞았다. 전체 국민 중 헌혈 참여 인구는 2012년 4.16%였고 이듬해 4.46%로 올라서나 싶다가 지난해 4.34%로 다시 내려앉았다. 기념품을 받거나 자원봉사 시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참여하는 헌혈로는 절벽을 메울 수 없다. 10, 20대에게 떠맡긴 헌혈에 30대는 물론이고 40, 50대도 참여해야 한다. 전체 헌혈(2010∼2014년)에서 20대가 41.2%로 가장 많이 차지하지만 30대는 12.4%로 뚝 떨어지고 40대로 가면 6.3%, 한 자릿수다. 이 연령대에서도 활발하게 헌혈에 참여해야 하는데 선진국과 달리 그렇지 못하니 늘 수급 불안에 시달리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다행히 작은 희망이 보인다. 연령별 헌혈 인구 자료를 보니 60대 이상이 0.6%로 나타났다. 고령이라도 60세부터 64세까지 헌혈 경험이 있으면 65세 이상이라도 의사의 판단을 거쳐 헌혈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이 0.6%는 몸과 마음이 그 누구보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분들이다. 나는 이들을 ‘은발의 영웅’이나 ‘그레이 노블레스’라고 부르고 싶다. 산더미 같은 돈이나 인공지능도 만들지 못하는 피를, 얼굴 모르는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놓기 때문이다. 이런 범주에 장관 감투 쓰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자기 아들딸과 부모를 챙기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리다가 뒤늦게 변명하려니 해명이 새로운 논란을 만들 정도다. 이런 후보자가 적지 않지만 헌혈을 많이 했다는 뉴스는 들은 적 없다. 검증 항목에 없기도 하지만 그간 나온 행적을 보면 헌혈할 만큼 국민을 위해 인생을 산 후보자가 있나 싶다.

윗물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선출직이나 국회 인사청문회에 서는 사람을 검증할 때 헌혈 여부를 물어야 더 많은 국민이 동참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최소한 그 자리에 가고 싶다면 헌혈증 10개쯤은 갖고 있게 말이다. 자신의 입신양명은 물론 자식이나 부모 위해 불법 탈법을 가리지 않았더라도 한번쯤은 자기 몸을 국민 위해 바치도록….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헌혈 절벽#헌혈 인구#대한적십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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