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의 워치콘 X]‘죽은 血盟’ 되살려준 아마추어 외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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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북한과 혈맹의 관계를 맺어왔고…”라고 말했다는 대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직후에도 ‘혈맹’이라며 감싸다니…. 더욱이 최고지도자가? 전문가들은 “최근 북한 공식매체가 중국을 거명하며 비난해서 중국조차 경악하는 상황인데…”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0일 국회에서 “(시진핑이) 혈맹이란 단어를 썼지만 그것은 지금이 아닌 과거 북-중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데서 의문이 다소 풀릴 것도 같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귀에 대고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각인시킨 시진핑이니 그런 얘기도 할 법하겠다고 넘기려 했다. 한데, 그것도 아니란다.


혈맹, 폐기된 구시대 용어

정상회담 배석자에 따르면 ‘혈맹’이란 말은 아예 나오지 않았다. 시진핑이 과거 북-중 간 역사적 특수관계를 설명하며 그렇게 해석할 만한 언급은 했지만 혈맹이란 말은 없었다고 한다. 중국 측은 이미 비공식 경로로 ‘허위 보도’를 바로잡아줄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작년 여름 더불어민주당 초선 의원들이 방중해 벌인 중국 학자들과의 토론회에서 ‘혈맹’ 발언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논란이 벌어졌던 것과 판박이인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중국에서 과거 북-중 관계를 표현했던 ‘혈맹’은 1990년대 초 한중 수교와 김일성 사망 이후 공식 폐기됐다. 2003년 방중한 조명록 북한군 차수가 북-중 관계를 ‘피와 탄환’으로 표현하자 후진타오 주석은 ‘전통적 우의관계’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과거 역사를 얘기할 때 ‘피를 나눈’ ‘피로 맺은’ 같은 표현을 쓰긴 한다. 중국 권력서열 5위 류윈산도 재작년 방북 때 “피를 뒤집어쓰며 싸운 역사”를 거론했지만 ‘혈맹’이라곤 하지 않았다.

혹자는 피로 맺은 역사가 혈맹과 뭐가 다르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도 그 말을 쓰기 싫어하는 것은 더는 북한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중국 학자들도 “강대국과 약소국 간 비대칭 동맹이었던 중조(中朝) 관계에선 개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드는 ‘미파요구(尾巴搖狗)’ 현상까지 나타난 미성숙한 국가관계였다”며 정상적 국가관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한다.(선즈화 ‘최후의 천조’)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은 죽은 ‘혈맹’을 끄집어냈다. 북-중 관계를 벌려놔도 시원찮을 판에 국제사회가 두 나라를 더욱 끈끈한 관계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당장 동북아엔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 구도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해설이 뒤를 잇고 있다.

‘미담’ 둔갑한 외교 事故

청와대는 며칠 전 ‘대통령 순방 뒷이야기’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그중엔 이런 내용도 있다. ‘한중 정상회담이 끝났을 때 김현철 경제보좌관이 크게 박수를 침. 이에 시진핑 주석이 깜짝 놀라고 문재인 대통령도 놀라서 바라봄. 김 보좌관은 중국과의 관계가 풀려가는 것을 보고 경제문제도 풀리겠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고 밝힘. 정상회담장에서 수행원이 박수를 친 건 처음.’

정상외교의 현장에서 벌어진 이해하지 못할 해프닝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모양새다. 자료가 배포된 건 문 대통령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한반도 문제인데도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없다”며 극도의 무력감을 표시한 바로 그날이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시진핑#한중 정상회담#혈맹#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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