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의 길]소년 동주, 만주땅에서 역사와 詩를 만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9일 03시 00분


<2>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시 ‘곡간’ 육필원고.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윤동주의 시 ‘곡간’ 육필원고. 유족 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만주는 서글픈 변두리였다. “돈 벌러 간 아버지 계신 만주땅”(‘오줌싸개 지도’)은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유랑지였다.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 명동촌(明東村),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변두리에서 1917년 12월 30일 한 생명이 태어났다.

 
산들이 두 줄로 줄다름질치고,
여울이 소리처 목이 자젓다.
한여름의 햇님이 구름을 타고,
이 골작이를 빠르게도 건너련다

―윤동주 ‘곡간’(1936년 여름)에서
 

산들이 두 줄로 줄달음질치는 골짜기(谷間·곡간)에 있는 명동마을에 꽃이 피면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집 근처 풍경을 동생 윤일주는 생생하게 남겼다.

명동집은 마을에서도 돋보이는 큰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텃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 밖에는 30주가량의 살구와 자두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우물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 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위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 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윤일주 ‘윤동주의 생애’·1976년)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생가. 최근 생가 앞에 대리석을 깔고 여기저기 시비를 세워 놓아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두번째 사진은 생가 안내비. ‘중국 조선족 애국’이란 표현은 사실과 달라 수정되어야 한다. 동아일보DB
만주 명동마을 윤동주의 생가. 최근 생가 앞에 대리석을 깔고 여기저기 시비를 세워 놓아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두번째 사진은 생가 안내비. ‘중국 조선족 애국’이란 표현은 사실과 달라 수정되어야 한다. 동아일보DB
윤동주는 마을에서 돋보이는 큰 기와집 아들이었다. 할아버지는 개척하여 소지주였고, 아버지는 장사도 하시고 회사에도 다니셨다고 윤일주는 회고했다. 명동마을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부자 소리 듣는 소지주의 후손이었던 윤동주는 맘껏 공부할 수 있었다.

또래 친구들과 뽕나무 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집 동쪽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며 우물 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윤동주 아버지가 선생으로 있던 명동학교에서는 변질되지 않은 갓 태어난 한글을 가르쳤다.

“동주랑 같이 학교에서 1학년 때 국어 공부를 한 이야기인데, 당시의 교과서는 ‘솟는 샘’이란 등사본이었다. ‘가’자에 ‘ㄱ’(기역)하면 ‘각’하고, ‘가’자에 ‘ㄴ’(니은)하면 ‘간’하여 천자문을 외듯이 머리를 앞뒤로 저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암송하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김정우 ‘윤동주의 소년시절’·1976년)

명동학교는 졸업식 때 파인(巴人)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나누어주는 학교였다. 윤동주는 한글로만 작품을 남겼다. 중국어 성적이 높았던 윤동주지만 중국을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로 구별했고, 일본을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구별했다. 그에게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는 이국어였다. 변두리에서 배운 때 묻지 않은 한글과 투박한 사투리를 버무려 그는 고소한 시를 썼다.

변두리에 있는 ‘언덕 중턱의 교회당’은 북간도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명동마을 모든 집의 막새기와에는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이 새겨 있었다. 천둥 비가 내려 무서워하는 동생들을 윤동주는 “예배당 십자가를 봐”라며 달랬다. 성탄절에 친구들은 교회당에서 가까운 동주네 집에서 새벽송을 준비하기도 했다.

변두리에 살던 저들은 ‘히브리인’(경계를 넘어선 방랑인)들이었다. 외삼촌 규암 김약연은 환갑에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된다.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캐나다 임마누엘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자였다. 김재준은 1937년 3월부터 1년 반 동안 룽징(龍井) 은진중학 교목으로 지냈다. 김약연, 문재린, 문익환, 문동환, 송창근, 김재준, 윤동주, 송몽규, 안병무, 강원용 등 이들은 예언자와 예수를 혀가 아니라, 몸으로 살려고 했다. 윤동주 시를 해석할 때 성경은 종요로운 텍스트다.

이 변두리 명동학교에서 민족교육이 살아났다.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만주로 가서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시킨 의인들이 있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은 맹자와 독립사상을 몸으로 가르쳤다. 1901년에 세운 규암재 이름을 명동서숙으로 바꾼 그는 1909년 다시 이름을 명동학교로 개칭했다. 예배당과 학교 건물을 서양식 벽돌집으로 짓고, 서울 기독교 청년학교를 갓 졸업한 실력자 정재면을 모셔 신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명동소학교는 일경이 볼 때 불손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이 우글거리는 소굴이었지만, 윤동주에게는 한없는 자유를 가르쳐 준 꿈터였다. 윤동주는 4학년 때 잡지 ‘아이생활’을 서울에서 구독해 읽었고, 당찬 송몽규는 ‘어린이’에 독자편지를 투고해 실리기도 했다. 두 아이가 읽은 잡지를 동네 꼬마들이 돌아가며 읽었다. 5학년생 몽규와 동주가 찍어낸 등사판 월간지 ‘새 명동’은 두 아이의 운명을 엿보인 여린 새싹이었다.

지금 명동마을 윤동주 생가 입구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문구에서 ‘애국’의 대상은 조선이 아니라 중국이란 뜻이다. 중국 국적으로 산 적이 없고, 중국어로 작품을 남기지 않았던 윤동주로서는 황당한 일이다.

변두리 만주에 소설가 염상섭 강경애 현경준 김창걸 안수길 박영준 황건, 시인 박팔양 유치환 백석 김조규 서정주 함형수 등이 거쳐 갔다. 그들은 잠시 머물렀지만, 윤동주는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고 다시 만주에 묻혔다. “아아, 간도에 시와 애수와 같은 것이 발효(醱酵)하기 비롯한다면 윤동주와 같은 세대에서부텀이었고나!”(정지용 ‘서문’)라는 평가처럼, 저들보다 늦게 태어난 윤동주는 변두리가 낳은 작은 별이다.

윤동주는 만주의 시인일까.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별 헤는 밤’)라며 만주를 그리워했지만, 윤동주의 시는 만주에 갇혀 있지 않다. 후기로 갈수록 지리적 고향을 넘어, 인간의 원형적인 본향의식으로 향한다.

모든 변두리에서 진리가 나오지는 않지만, 많은 진리는 변두리에서 태어난다. 싯다르타의 고향 룸비니와 카필라바스투는 인도 북부의 변두리 성읍 공동체였다. 시장과 공동묘지라는 변두리에서 지냈기에 맹자는 여민동락 사상을 축조할 수 있었다. 큰 인물이 나올 리 없다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는 지리멸렬한 갈릴리에서 진리를 말했다. 윤동주, 그는 막막한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희미하게 밝혀주는 변두리의 작은 별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만주 명동마을#윤동주 곡간#북간도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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