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 씨의 산문집 ‘말하다’에는 그가 대학 시절 학군후보생을 중간에 그만둔 때의 일화가 나온다. 당시엔 학군단을 거쳐 장교로 임관하면 전역과 동시에 대기업으로의 취업이 보장되었다는데, 그 꿀보직을 그만둔다니 당연히 주변은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지 해온 게 아깝지도 않냐?”는 동기들의 말에, 미래의 베스트셀러 작가 김영하 군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아까워.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아.”
후, 멋지다. 20대 초반에 ‘내 길’을 찾겠다며 대차게 돌아서는 저 담대함. 사실 미래를 낙관할 수 있었다는 그때나 그렇지 못한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 길’을 찾기 위한 시간은 초조하기만 한데, 그것은 우리 사회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켜지는 스톱워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애가 돌도 안 됐는데 벌써 걸어요!” 째깍. 째깍. “우리 반에 벌써 6학년 수학을 푸는 신동이 있어요!” 째깍. 째깍. “옆집 애는 세 살인데 영어로 노래를 한다고요!” 째깍. 째깍.
어릴 적 위인전을 보면 모차르트는 세 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율곡 이이는 세 살 때 마당에 열린 석류 열매를 보고 시를 읊었다며 너희도 보고 배우라 한다. TV 속 영재 발굴 프로그램과 거리의 영어 유치원 홍보물은 ‘벌써’ 무엇 무엇을 해내고 ‘빨리’ 남달라진 누군가를 찬양하기에 바쁘다. 그뿐인가. 대학은 ‘재수 없이’ 한 방에, 취업은 ‘칼졸업’ 후 바로, 결혼은 ‘적령기’에 남부럽지 않게, 승진은 최대한 ‘남들보다’ 빨리. 더 이상 위인전을 읽지 않는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애태우는 속력의 훈장들은 많고도 많다.
사실 ‘이 산이 아닌가벼’ 하는 생각은 누구나 가끔씩 한다. 그것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행동하기에 시간은 늘 모자라고 시작은 늘 막연할 뿐이다. 모처럼 작동한 고민의 GPS는 종종 더 중요해 보이고,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오늘의 일들에 밀려 금세 다시 꺼져버린다. 꾸준히 속력은 높였으되 스스로 방향을 찾아본 경험이 적은 우리에겐 확실하지 않은 내 감을 믿는 것보다는 속도 하난 확실한 길을 가는 것이 마음 편하다.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건,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처음에는 막연했지만, 그 생각을 믿고 행동했을 때 결국 더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는 경험적 믿음. 그렇기 때문에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이 산이 아닌가벼’를 해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내면의 생각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하고, 머리채 붙잡고 싸워도 보면서 고민의 근육을 늘리는 거다. 언젠가 ‘저 산으로 한번 가 보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스스로 납득하고 믿어줄 수 있는 힘을.
“앞으로 뭐가 될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런 삶은 아닐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 만약 제가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냥 여름 훈련에 참가하고 장교로 임관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뭐든 됐겠지만 아마 작가는 되지 못했을 겁니다.”(김영하, ‘말하다’ 중에서)
이 산이 아닌 것은 몇 번이든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하루바삐 이 산을 내려가 다시 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큰일 날 이유 또한 없다. 내 길을 찾는다는 것이 꼭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맨주먹으로 일궈낸 대단한 무언가’일 필요는 없지 않나. 현실의 그릇 안에서 타협한 비빔밥도 괜찮고, 궤도를 수정해 가며 적절히 머무를 정거장을 찾아도 좋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내 길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계는 영원히 방향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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