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기의 뉴스룸]무조건 캐비닛을 싹 비우는 게 상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19일 03시 00분


문병기 정치부 기자
문병기 정치부 기자
‘캐비닛 문건’ 논란이 뜨겁다. 박근혜 정부로부터 인수인계 문건 몇 장 넘겨받은 것이 전부라고 했던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1600여 건의 문건이 무더기로 발견됐으니 놀라울 만하다. 내용은 또 어떤가. 청와대가 공개한 문건에는 삼성 합병, 문화계 블랙리스트, 세월호 사건 등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 사태의 불씨를 댕긴 사건들이 포함돼 있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을 임명하면서 “국정 농단 사건의 공소유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던 청와대로서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감 떨어진’ 격이다.

야당에선 청와대의 ‘불순한 의도’에 대해 공세를 펴고 있다. 청와대가 “적법하지 않은 지시사항이 담겨 있는 문건”이라는 평가를 내리며 문건의 내용을 유추할 수 있을 만한 ‘양념’을 더하기는 했지만 법적으로 허용된 테두리 안에서 문건을 활용하는 것을 문제 삼기는 어렵다. 문건 발견 사실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청와대가 비공개로 검찰에 문건을 넘겼다는 것이 드러나면 오히려 정치적 오해가 커질 수 있다”고 설명한 것도 아예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청와대 캐비닛 문건 파동이 대통령기록물을 정치적으로 활용한 또 하나의 나쁜 선례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기록물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공공기록물관리법에 이어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제정하면서다. 이전까지 역대 정권은 대통령기록물을 사저로 옮기거나 파기했다. 1997년 외환위기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대통령기록물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 제정된 뒤로는 매번 ‘백지 인수인계’ 논란이 일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에선 “인수인계 받은 것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위기대응 매뉴얼’ 한 권 정도다. 청와대는 정말 깨끗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인계받은 것은 10쪽짜리 현황 보고서와 회의실 예약 명세가 전부”라고 한 것과 비교하면 주어만 바뀌었을 뿐이다.

자료 파기도, 백지 인수인계도 그 배경엔 후임 정권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애초에 지정기록물을 열람하기 위해선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도록 하는 등 봉인된 기록물을 웬만해선 확인할 수 없도록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규정한 것도 후임 정권에서 기록물이 정치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미국은 봉인된 지정기록물이라도 현직 대통령이 공무수행에 필요한 유일한 기록물이면 열람할 수 있도록 한 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사실상 기록물을 못 보도록 막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초 청와대 안팎에선 이참에 법을 바꿔 정권 인수인계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소모적인 논쟁과 국가적 자산인 대통령기록물을 창고에 봉인해 낭비하는 문제는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캐비닛 문건 공개는 새 정권이 전임 정권의 자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정권 차원의 인수인계는 ‘신뢰’ 없이는 이뤄지기 어렵다. ‘백지 인수인계’의 잘못된 관행을 뜯어고칠 좋은 기회를 이번 파동으로 놓친 것 같아 안타깝다.
 
문병기 정치부 기자 weappon@donga.com
#캐비닛 문건#박근혜 정부#대통령기록물관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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