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말 겨울 어느 날, 서울 덕수궁 석조전 2층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과. 조개탄 난로 위 노란색 양은 주전자에서 보리차가 끓고 있었다. 최순우 미술과장이 코트를 벗으며 정양모 학예관에게 말했다. 감격스러운 말투였다. “굉장한 일이 있어. 수정(水晶) 선생과 점심시간에 만났는데 그 어른 말씀이 ‘내가 평생 모은 유물을 전부 박물관에 내놓기로 하겠습니다’ 하시잖아. 이건 참 굉장한 일이야. 아직 누구에게 말하지 마시오.”
1973년 1월, 정 학예관이 ‘한국미술 2000년전’ 유물 대여를 위해 수정 박병래의 서울 돈암동 집을 찾았다. 줄곧 부러운 표정으로 신기한 듯 유물을 매만지자 박병래가 말했다. “그것들도 모두 박물관에 보내드리지요. 곧 정 선생 마음대로 하시게 될 겁니다.”
1974년 3월, 박병래는 자신이 45년간 모아온 조선 백자 362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그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소량의 기증은 있었지만 개인의 컬렉션을 대량으로 국가에 기증한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초년병 내과의사 시절인 1929년. 26세의 박병래는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조선인이 조선의 도자기도 모르냐”는 지적을 받고 충격에 빠졌다. 우리 문화재가 밀반출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도자기 수집의 길로 들어섰다. 오전 병원 일과를 마치면 서울시내 골동품상을 돌아 백자 하나를 사들고 와야 직성이 풀렸다.
그는 월급으로 백자를 수집한 컬렉터였다. 컬렉션은 대부분 항아리 주전자 필통 연적 등의 생활 백자였다. 수집품이나 그의 삶 모두 소박하고 담백했다. 박병래는 기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도자기와 함께 지내온 내 인생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조상들이 만든 예술품을 혼자만 가지고 즐긴다는 일이 죄송스럽기도 했다.” 그는 백자뿐만 아니라 기증품 도록까지 만들어 국립중앙박물관에 건넸다. 기증 직후 박물관은 이를 기념하는 전시회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시를 열흘 앞둔 5월 14일 박병래는 세상을 떠났다.
문화재 수난기였던 일제강점기, 박병래 같은 컬렉터들 덕분에 우리 문화재는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박병래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공유의 미학을 실천한 컬렉터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그가 기증한 백자들을 만날 수 있다. 요즘 문화재와 미술품을 기증하는 사례가 많이 늘었다. 그 중요한 계기는 1974년 박병래의 백자 기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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