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백 투 헬(Welcome back to Hell·‘지옥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3년간 해외 근무(미국 특파원)를 마치고 귀국해 친구와 지인들에게 인사했더니 2명 중 1명꼴로 이렇게 환영해줬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대한민국은 ‘헬(hell)조선’이라고 불리면서 모두의 지옥이 돼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1 아들의 친구들도 “지옥 같은 한국에 왜 돌아왔냐”고 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친구도, 전교 10등 안에 드는 공부 잘하는 친구도 서로 다른 이유로 “고2 고3이 되면 얼마나 더 힘들까”라고 걱정했다. 아내가 만난 이웃 엄마들도 비슷한 지옥론을 폈다. “한국은 끝이 안 보이는 사교육 전쟁터 같아요.”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이달 19일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육아와 교육 부문을 눈여겨봤다. 새 정부는 “육아 문제부터 국가가 책임을 지고 수행하는 것이 한국 공동체 소멸을 막는 일의 시작”이라고 판단했다. 또 “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기조 위에서 진로맞춤형 교육, 선진국 수준의 교육여건 조성, 한 아이도 놓치지 않는 기초학력보장 등 공교육을 혁신하겠다”고 약속했다. “국가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선언이었다. A4용지 193쪽 분량의 ‘100대 국정과제 487개 실천과제’ 어디에도 국민이 추가 부담하거나 새로 책임져야 할 일은 없었다. 약속대로만 실현된다면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지옥 탈출은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문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강조한다. 들을 때마다 가슴 뛰는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구체적 질문으로 들어가면 쉽지 않은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한국 대입 수험생에겐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1년에 단 1회’ 평등하게 제공된다. 그날 몸이 아프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엄마가 실수로 반입금지 품목인 휴대전화를 도시락에 넣는 바람에 시험장에서 쫓겨나도 모두 ‘개인의 책임’이다. 국가는 시험 감독을 공정하게 하고, 점수를 정의롭게 통보하면 그만이다. 반면 미국 수능 SAT는 1년에 7차례나 실시되고, 초중고교생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 미국처럼 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평등한 기회’란 멋진 말도 상대적일 수 있고, 다른 차원의 불평등이 숨겨져 있을 수 있음을 인식하자는 제안이다.
문 대통령은 최근 대입전형료에 대해 “분명한 산정 기준 없이 해마다 인상되고, 금액도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대학 당국들은 난처했겠지만 학부모들의 공감을 얻기 충분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말했으면 좋았다고 생각한다. “1인당 최대 100만 원 넘게 지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고 한 말씀을 더 했다. 정부가 대입전형료가 부당하게 비싼 건 아닌지를 조사·감독할 수는 있지만 남들보다 ‘합격의 기회’를 더 얻으려고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개인의 선택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의문이다.
역대 정부들은 ‘장밋빛 전망’으로 시작해 ‘NATO(No Action Talking Only·말만 많고 실천은 없는) 정부’란 비판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계승하려는 노무현 정부도 그랬다. 새 정부는 NATO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부터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 실천과 성과를 생각하며 약속하고 다짐해야 한다. 큰 기대가 무너지는 실망과 절망이 지옥 같음을 우린 이미 너무 많이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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