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동네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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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지내던 낡은 사진첩을 뒤적이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색 바랜 돌잔치 사진 속에서 남자 아이들은 한복 입고 모자인 복건(幅巾)까지 갖춰 쓴 채 의젓하게 웃고 있다. 여자 아이들은 치마, 저고리에 굴레를 썼다. 중고교에 진학할 때면 아버지 어머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금 보면 양친과 내가 이렇게도 닮았는가 싶어 흠칫 놀라기도 한다. 동네 사진관은 젊었던 부모님을 기억 속에 오래 모셔둘 수 있게 했다.

▷요즘 사진관은 실제 나이보다 4, 5년은 젊게 보이도록 사진을 찍어준다. 점이나 잡티, 주름을 없애 얼굴이 한결 환해진 덕분이다. 입사원서에 붙은 사진 속 인물과 지원자가 같은 사람인가 의심될 정도로 차이가 클 때도 많다. 성형수술이 따로 없다. 포토샵 프로그램의 위력으로 ‘원판 불변의 법칙’은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사진관 주인들이 단순하게 사진만 찍어서는 생존하기 힘든 시대가 된 것이다.

▷사진관들은 2000년대 초부터 신기술의 융단폭격을 받기 시작했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온 지 얼마 안 돼 카메라 기능을 갖춘 스마트폰이 등장했다. 필름의 제약 없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사진관은 ‘인화하는 곳’으로 밀려났다. 2003년부터는 필름 원판이나 사진 파일 소유권이 소비자에게 있다는 소비자피해보상규정이 시행됐다. 고객이 사진을 찍은 뒤 파일도 가져가면 다시 사진관을 찾는 일이 전보다 훨씬 줄었다. 사진관 수가 2007년 3만여 곳에서 올해 1만4000여 곳으로 반 토막 난 원인이다.

▷정부가 7월부터 공공기관에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면서 사진관은 한 번 더 결정타를 맞게 됐다. 사진관 수입의 70∼80%를 차지한다는 증명사진 일감이 끊길 위기에 놓인 것이다. 한국프로사진협회 회원 1000여 명이 28일 삭발까지 하며 생존권 시위에 나선 이유다. 이미 입학식장이나 졸업식장에서 전문 사진사들을 찾기 힘들게 됐다. 사진관들이 신기술과 정부 정책에 밀려 계속 하나둘 없어진다면 우리의 정겨웠던 기억까지 사라질지 모르겠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동네 사진관#사진관 수#블라인드 채용#한국프로사진협회 생존권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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