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차 그리스를 찾았을 때다. 벼룩시장이 서는 아테네 중심 모나스티라키에서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향해 아드리아누 거리를 따라 걸었다. 도중에 헤파이스토스 신전을 지났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 태어난 형제(전쟁의 신 아레스) 중 맏이.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부인으로 둔 손재주 뛰어난 기술의 신이다. 10년 전 취재 때 지나쳤던 터라 거기부터 들렀는데 가보니 일대는 아고라 터였다.
아고라는 통치자의 연설을 듣기 위해 시민이 모였던 곳. 소크라테스 활동기인 기원전 4세기엔 상점도 들어서 시장처럼 북적댔다. 이곳은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 에리다노스 강변으로 부지는 정사각형(1만5000m²). 한가운데 배수로 옆길로 화폐 주조소와 문서 보관소, 스토아(Stoa·대리석 열주의 지붕 아래 조각상으로 치장된 이 회랑은 시민의 대화 공간)가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재판정(아르콘 바실레우스)과 독배를 들이켠 감옥도 거기 있었다.
아고라는 소크라테스의 주 활동 무대였다. 명성은 그리스반도를 통틀었다. 그를 만나러 아테네를 찾는 폴리스(도시국가)의 젊은이가 30여 년간 끊이지 않았을 정도로. 못생긴 소크라테스는 괴팍하다 할 정도로 말꼬리를 물고 질문을 던져댔다. 그것도 50여 년을 한결같이. 그렇게 칠순에 이른 소크라테스가 고소를 당했다. 젊은이로 하여금 신을 등지고 타락시켰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한 세기나 꽃을 피웠음에도 세상의 주관자는 만물에 깃든 신이라고 믿던 종교국가였다. 그래서 신을 배신케 한 건 극악무도한 불경죄였고 그래서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고소자(3명)와 배심원 500명 앞에서 스스로 변론해야 했다. 하지만 평생 그가 해온 일은 생각을 일깨운 것뿐. 삶에서 무엇이 바람직하고 선한 것인지 찾도록 물음으로 자극한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어느 시민에겐 무례와 오만으로 비쳤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맞서서 그게 아님을 밝혀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고소를 합법 행위로 수용하고도 변론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그거야말로 최고의 변론 아닌가’라며.
하지만 지인들은 달랐다. 불경죄는 허울이고 실제는 그를 죽이려는 것임을 눈치채서다. 그 배경은 이렇다. 운명의 숙적 스파르타와 벌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참패, 이어 일어난 내전의 참화 등등. 20만 인구가 2만으로 격감할 정도로 29년이나 지속된 아테네의 환난은 끔찍했다. 그래서 현실에 대한 환멸도 극에 치달은 상황. 아테네엔 카타르시스가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 소크라테스가 지목됐다. ‘오만의 화신’을 능가할 공공의 적은 없었으므로.
소크라테스가 그걸 몰랐을까. 그는 알았다. 이런 편견의 팽배를. 판결도 예견했으리라. 그러니 도피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하지 않았다. 재판정에 섰다. 거길 평소와 다름없이 선이 무언지 찾는 대화 장소로 택한 것이다. “악의와 비방으로 여러분(배심원)을 설득한 사람도 있고 그렇게 설득당한 사람이 다른 이를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모두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 누구도 여기 데려와 심문할 수 없어서입니다. 그러니 제 변론은 가상의 상대를 향해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데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정말로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그건 고소인 때문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편견과 악의 때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배심원은 1, 2차 재판 모두 유죄라고 선언했다. 4주 만에 그는 독배를 들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죽음. 이건 지금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엄중하다. 정부가 ‘탈(脫)원전’ 기조에 대한 국민적 찬반 논란을 공론화위원회의 배심원단을 통해 잠재우고 이끌려는 ‘2400년 전 아테네 식 시도’ 때문이다. 원전 위험성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고 이제껏 각광받아 온 이유 역시 같다. 찬반양론이 팽팽한 건 그 때문이니 어떤 결정도 신중해야 한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전문가그룹의 찬반 공개토론이나 국민적 의견 수렴도 없이 탈원전 로드맵에 이어 공사 중단까지 결정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비판이 거세지자 공론화위원회를 내세웠고 그래도 가라앉지 않자 ‘결정’이 아니라 ‘참고’라 변명했다. 그럼에도 기조에 변화가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그걸 보여주는 듯해서다. 그도 그렇게 죽지 않았던가. 오만하다며 공적으로 내몬 편협한 시민과 배심원의 편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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