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 칼럼]1940년 덩케르크, 2017년 대한민국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일 03시 00분


전쟁영화 ‘덩케르크’의 병사들… 편가르기로 희생양 만들다
與 부자증세, 野 서민감세… ‘뭣이 중헌디’ 본질 외면
핀셋 증세의 다음 차례는?
전쟁보다 훨씬 위험한 정치… 의자 뺏기 게임 부추기지 말라

고미석 논설위원
고미석 논설위원
영국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이 연출한 ‘덩케르크’는 실화의 재구성으로 묵직한 감동을 남기는 영화다. 배경은 1940년 5월 28일부터 6월 4일까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됭케르크) 해변에 고립된 연합군 구출작전. 이 작전으로 33만8000여 명이 사지를 벗어났다. 어선 요트 등 민간 선박 850척이 만들어낸 영화 같은 기적이었다.

영화는 전쟁의 참화, 애국심, 인간 본성을 두루 짚는다. 요즘 우리 사회는 ‘나라 사랑’을 ‘국뽕’이란 신조어로 비하하는 분위기지만 놀런 감독은 영국인의 강고한 애국심을 조용히 각인시킨다. 재산 목록 1호인 요트를 몰고 도버해협을 건너온 노인은 가는 도중 구조한 젊은 군인이 안전한 땅으로 돌아가자고 위협해도 전선을 향해 나아간다. 극한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발휘한 용기, 인간애, 희생정신은 울림이 깊다. 영웅은 나와 무관해도 범인(凡人)은 바로 우리의 일이므로.

한편, 생존을 향한 일념으로 병사들이 벌이는 살아남기 꼼수, 이기심, 비겁한 선택은 현실감을 한층 끌어올린다. 밀물을 기다리며 어선에 숨어든 병사들이 그랬다. 문자 그대로 한배를 탄 운명으로 다들 한마음이었지만, 구멍 난 배에 물이 흘러들자 생각이 바뀐다. 누군가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집단 여론으로 굳어간다. 시종일관 말이 없는 병사 하나가 희생양으로 지목된다. “독일군 아니냐?”는 추궁에 그는 “프랑스군”이라고 답하지만 이미 정한 결론은 요지부동. 한 영국군이 용기 있게 항의하자 ‘다음 차례는 너’란 집단 협박으로 간단히 잠재운다. ‘당신만 빼고 우리들은 같은 부대 출신’이란 이유다. 적이 사라진 곳에서 진영은 다시 축소 지향 울타리를 친다.

전쟁이야 그렇다 치고, 우리 사회에서 유사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왜인가. 할 일 산적한 나라에서 하릴없는 논쟁거리를 생산해 국가 동력을 축내는 ‘부자증세’ ‘서민감세’ 논란이 그 하나다. 정부여당이 초고소득층 대기업 증세 카드를 내밀었더니 ‘유일 야당’을 자처하는 자유한국당은 담뱃세 등 서민감세로 맞불을 놨다. 그 나름대로 사활이 걸린 전쟁인지 모르나 ‘위기설’이 맴도는 한반도는 그런 다툼을 벌일 만큼 평온하지 못하다.

현저한 불균형을 개선하고, 버는 만큼 세금을 내야 한다는 교과서적 취지에 누가 반대하랴. 새 정부가 국정 과제의 머리맡에 올린 의욕을 뭐라 탓하겠는가. 다만, 그 고매한 이상을 위해 꺼내 든 단어가 ‘핀셋 증세’라는 점이 걸린다. 슈퍼 리치와 그렇지 않은 다수를 뜻대로 갈라쳐도 충분한 재원 확보는 어렵다는 게 이미 나온 진단이다. 핀셋 증세를 한다 치면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여당이었을 때 올린 담뱃세를 도로 내리자는 야당의 어깃장도 어처구니없긴 매한가지.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뭣이 중헌디’ 본질을 외면하는 것은 가히 난형난제다. 소득이 있으면 많든 적든 고르게 세금을 내는 게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라 설득하는 정치인은 없다. 이렇게 굳어진 사회 풍토가 국운을 결정짓는 것을 세계 역사는 알려준다.

‘정치는 전쟁보다 훨씬 위험하다. 전투에서는 한 번밖에 안 죽으니까.’ 영국 정치인 마이클 돕스가 쓴 정치 스릴러 ‘하우스 오브 카드’의 한 대목이다. 버락 오바마도 시진핑도 열광한다는 인기 미드의 원작소설이다. 잘못된 정치는 사람만 아니라 나라마저 여러 번 결딴낼 수 있다. 한 나라의 비극적 유산이 대물림되는 이유다.

“최상위 부자들에만 초점을 맞추면 우리 대다수가 얼마나 부자인지 잘 깨닫지 못한다.” ‘냉정한 이타주의자’를 쓴 젊은 철학자 윌리엄 맥어스킬이 최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전 세계 상위 1%의 연소득이 5만2000달러이니, 2만8000달러만 되어도 5% 안에 속한다는 얘기다.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은 2만7561달러. 지구촌 상위 5%급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는 핀셋으로 특정할 만큼 소수 사람들만 아니라 모든 개개인에게도 적용되는 개념일 수 있다. 나는 내 의무를 배반하지 않는 고결한 시민인가.

“영국이 위기에 처한 거지. 그러면 또다시 덩케르크 정신(위기에 처했을 때 나오는 불굴의 정신)이 나오겠지.” 더위에 펼쳐 든 ‘하우스 오브 카드’의 또 다른 구절이다. 위기 조짐이 보이면 영국인들은 덩케르크 정신으로 뭉치겠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깃발 아래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정치가 부추기는 의자 뺏기 게임에 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온 국민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 아무리 더워도.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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