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요즘 소설만 보면 자명해 보인다. 지난달 31일 나온 정지돈 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는 총기 소지가 허용된 2063년 한반도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마구잡이 총격전에 일반인도 방탄복을 입는 세상. 심지어 서울만 벗어나면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다. 앞서 국내에 출간된 일본 소설 ‘다리를 건너다’ 속 2085년은 이보단 사정이 낫다. 하지만 유전공학이 빚은 복제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복종부터 배우는 계급사회가 펼쳐진다. 그들은 물건처럼 사고 팔리며 사랑조차 통제받는다.
“현실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거라고 봅니다. 단지 먹고살기 팍팍해서는 아니에요. 더 이상 국가나 사회가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인식이 세계적으로 팽배합니다. 지금도 힘들지만 앞으로 더 나빠질 거란 피로가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거죠.”(신은영 도서출판 옥당 대표)
실은 이건 우리만의 얘기는 아니다. 서구에서도 디스토피아 문학이 엄청난 인기다. 오마르 엘 아카드가 쓴 ‘아메리칸 워’나 리디아 유크나비치가 집필한 ‘조안의 책’, 마이클 톨킨의 ‘NK3’…. 하나같이 비관적인 미래가 펼쳐진다. 참고로 NK3는 북한이 쏘아올린 생화학무기 탓에 인류의 기억체계가 파괴됐다는 설정. 미국 잡지 뉴요커는 이런 현상을 두고 “디스토피아 소설의 황금시대(Golden Age)가 열렸다”고까지 평가했다.
물론 이런 작품들이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온 건 아니다. 디스토피아 소설도 나름대로 역사가 짱짱하다. 서양 문학사에선 주로 19세기 후반을 태동기로 본다. 재밌는 건 당시는 사회주의 가치관이 짙게 깔린 유토피아 소설이 성행하던 시기. 이에 대한 ‘저항의식’이 디스토피아 소설의 씨앗이 됐단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을 절정이라 부를까. 최근 몇 년 동안 영화로도 제작됐던 소설 ‘헝거 게임’이나 ‘다이버전트’도 그다지 미래를 희망차게 그리진 않았는데. 미 뉴욕타임스는 이를 “새로운 디스토피아의 출현”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디스토피아 문학의 붐은 우울한 미래란 ‘설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미 우리에게 밀어닥친 ‘위기’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 미드 ‘왕좌의 게임’ 유행어를 갖다 쓴다면, 이미 벌써 “겨울이 다가온다(Winter is coming).”
‘작은 겁쟁이…’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2063년은 올해부터 46년 뒤. 지금의 웬만한 중장년이 살아있을 시대다. 그런데 이런 아노미가 벌어지게 만든 근원을 훑어보면 기시감이 상당하다. 대기 오염과 빈부 격차, 난민 급증…. 현 시대가 걱정하는 문젯거리들이 결국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망가뜨린 셈이다. ‘아메리칸 워’의 엘 아카드 작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푸념했다.
“난 현재의 몰락이 반영된 소설을 썼다. 그런데 자꾸 점술가의 예언처럼 받아들여 그게 맞나 아니나만 따진다.”
여전히 미래는 불투명하다. 누구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 디스토피아 문학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린 나빠질 거라고, 모두 추락할 거라 저주를 퍼붓는 게 아니다. 주의 깊게 내딛지 않으면 곧장 낭떠러지에 다다른다는 경고가 배어 있다. 그걸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다만 누군가가 답을 주길 멍하니 기다리진 말자. “겨울은 이미 왔다(Winter is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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