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세상은 온통 노란색이었다. 방송과 인터넷은 노란색 천지였고, 당시 노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국회 주변에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깃발을 흔들며 “선거 혁명을 이뤄냈다”고 열광했다.
2004년 4월 탄핵정국 속에서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49석에서 152석의 국회 과반 의석으로 압승을 했을 때 이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그해 정기국회를 앞두고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4대 중점 법안(사학법 개정, 신문법 제정, 과거사법 제정)을 포함한 ‘100대 개혁입법 과제’를 발표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강력히 반발했다. 정국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여야 협상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김원기 당시 국회의장과 임채정, 문희상, 유인태 의원 등 여당 중진 의원들은 국보법 안에서 위헌 논란이 끊이지 않는 찬양·고무죄 등 대표적 독소조항이라도 개정하자는 중재안을 언급했다. 흥분한 친노(친노무현) 의원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의원총회에서 국보법 개정을 주장하는 선배 의원들에게 몇몇 초선 의원들은 삿대질을 하며 “당을 떠나라”고 고함쳤다.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국회 밖에서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고 외치며 여당 의원들을 압박했다.
2년 넘게 이어진 국가적 논란 속에서 여당은 ‘개혁독재’라는 오명(汚名)을 떠안았을 뿐 건진 것이 없었다. 국보법은 일점일획도 고쳐지지 않았고, 2005년 12월 열린우리당의 강행 처리로 개정된 사학법은 2007년 7월 재개정됐다. 그사이 노무현 정부가 내걸었던 ‘100대 개혁입법 과제’는 ‘50대 개혁입법 과제’로 축소됐다가 나중엔 흔적도 찾기 어려워졌다. 반면 ‘4대 악법 저지’ 투쟁을 이끌었던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보수 진영의 새로운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노란 완장’이 세상을 뒤흔들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 건 최근 추가경정예산안 처리와 함께 마무리된 7월 임시국회 결과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국회 협상 과정에서 일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은 협상을 이끈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를 향해 “적폐세력과 뒷거래” “대통령을 지키지 못한 ×” “배신자” “정계 은퇴” 등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문 대통령의 공약을 ‘그대로’ 관철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다. 추경 통과가 임박한 지난달 22, 23일 주말엔 1000통이 넘는 문자폭탄을 받았다. 당내 일부 의원은 협상 결과를 두고 ‘누더기’ ‘반 토막’이라며 문자폭탄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임시국회는 일단락됐다. 이제 본 게임인 9월 정기국회가 다가오고 있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25, 26일 1박 2일 워크숍을 계획하고 있다. ‘100대 국정 과제’의 입법과 현실화를 위한 논의의 장이다. 때를 맞춰 민주당 일각에선 “국민의 힘으로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어느 정부나 여론의 지지가 받쳐주는 정권 초에 개혁 과제를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교한 우선순위 설정과 전략이 필요하다. 이념 논리에 갇혀 국보법 폐지 등을 무턱대고 밀어붙였던 열린우리당은 ‘차선’은 고사하고 ‘최하’도 건지지 못했다. 실패한 정치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더욱이 지금은 4당 체제의 여소야대 국회다.
편 가르기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부 극렬 지지층에 권력이 의지하는 순간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은 깨질 수밖에 없다. 선거 때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약속했던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이번엔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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