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여왕의 남편, 여왕의 첫 신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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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는 정말 잘생겼다. 가장 매력적인 점은 정말 쾌활하다는 것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독일계 왕족인 앨버트와 처음 만난 날 이런 일기를 썼다. 18세에 왕좌에 오른 여왕이 동갑내기 외사촌과 첫눈에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들은 1840년 결혼해 4남 5녀를 낳았다. 결혼식에서 여왕이 입은 순백의 드레스가 웨딩드레스의 유래다.

▷앨버트 공은 결혼 초기 여왕의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처지를 한탄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여왕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끄는 데 한 치의 부족함이 없도록 늘 든든한 참모 겸 조력자로 그 곁을 지켰다. 그런 남편이 마흔두 살 나이에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상심한 여왕은 평생 검은 상복을 벗지 않았다. 런던 로열앨버트홀은 남편을 추모해 붙인 이름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91)과 빅토리아 여왕은 긴 재위기간, 돈독한 부부 금실 면에서 닮은꼴이다. 작년 9월 엘리자베스 여왕은 고조모 재위기간(63년 7개월)을 뛰어넘어 영국 최장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요즘 말로 둘 다 ‘사랑꾼’이다. 아버지 조지 6세와 함께 왕립해군학교를 방문한 열세 살 엘리자베스 공주는 안내를 맡은 훤칠한 사관생도를 보고 가슴이 설렜다. 펜팔로 시작한 그들은 1947년 결혼에 골인했다. 그 청년이 필립 에든버러 공작(96)이다.

▷필립 공은 여왕의 남자인 동시에 첫 신하다. 그는 1953년 대관식에서 왕좌에 앉은 아내 앞에 무릎 끓고 제일 먼저 충성을 맹세했다. 그런 필립 공이 9월부터 공식 업무에서 손을 뗀다고 발표했다. 나이와 건강상의 이유다. BBC 인터뷰에서 “그동안 내 몫을 했다. 이제는 날 위한 시간도 갖고 싶다”고 토로한 것이 6년 전이었다. 여왕의 남편에게도 고충이 있다. 자신의 성(姓)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 필립 공은 왕실 일원으로 637번의 해외 순방, 세계자연기금 등 780여 개 단체의 수장과 후원자로 바쁘게 살았다. 밖에서 보기엔 여왕을 아내로 둔 팔자가 부러울지 몰라도 여왕의 그늘 속에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엘리자베스 2세 여왕#필립 에든버러 공작#여왕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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