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호의 과학 에세이]에이즈 극복, 가능성이 보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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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김재호 과학평론가
김재호 과학평론가
한 대학의 과학 발표수업이 언제나 “지금껏 밝혀진 바에 따르면”으로 시작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표현은 반증 가능성을 열어 두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발표자가 진행한 실험 혹은 조사한 최신 문헌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남겨두려는 것이다. 과학은 매번 인류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담당 교수가 보여준 과학에 대한 열린 태도가 존경스럽다.

최근 에이즈와 관련해 기존의 과학상식을 뛰어넘는 사례가 ‘사이언스’에 소개돼 화제다. 남아프리카의 한 여자아이가 8년 이상 치료제 없이 에이즈를 견뎌낸 것이다. 아이는 HIV(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생후 8주부터 약물을 투여받았다. 40주 후에 치료 약물이 중단된 이래, 아이는 지금껏 8년 반 동안 바이러스 재발이 없었다. 그렇다고 HIV가 완치된 건 아니다. 표준검사에서 발견되지 않을 뿐 검사의 감도를 높이면 잠복 중인 HIV가 쉽게 발견되었다.

에이즈(AIDS)는 후천성 면역결핍증이다. 즉 에이즈는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조건을 뜻한다. 에이즈는 그 자체로 질병을 불러오지 않는다. 에이즈는 면역력을 떨어뜨려 감염에 이르게 한다. 또한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는 종양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악성종양을 발생시킨다.

HIV의 경우 빠른 증식 때문에 백신 만들기가 힘들다. HIV는 침입 초기 2주에서 6개월 사이 재빨리 증식한다. 고열, 설사, 구토 등의 증상은 약 한 달 후 없어지고 수년 뒤에 에이즈로 나타난다. HIV는 면역을 주관하는 헬퍼T세포로 들어가 세포의 DNA에 자신의 유전정보를 집어넣고 복제한다. 새 HIV들은 세포 밖으로 나가면서 헬퍼T세포들을 파괴시킨다. 그 결과 주변의 세균들이 약한 면역력의 몸으로 들어와 병을 유발한다. 현재는 항레트로바이러스(ARV) 약물로 HIV의 활동을 늦출 뿐이다.

치료를 중단한 이후 오랫동안 바이러스가 탐지되지 않은 사례가 더 있다.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는 환자 23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들은 HIV 감염 직후 평균 3년간 치료약물을 투여받고 여러 사정으로 그 후 중단되자, 표준 테스트에서 대개 7년간 HIV가 탐지되지 않았다. 한 환자는 거의 17년 동안 치료를 받지 않아도 멀쩡했다. 하지만 약물 치료를 중단하면 언제든 바이러스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

조기 치료의 다른 결과도 있다. 감염이 시작되고 거의 10일 뒤부터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투여받은 어떤 환자의 경우 34개월간 거의 완벽히 HIV가 제거된 것 같았다. 그러나 환자의 피를 투입한 쥐 실험에서 HIV는 나타났고, 200개의 감염 세포만 있었던 환자는 치료를 중단하자 7개월 이상 지난 후 HIV가 다시 감지됐다.

만약 에이즈 환자를 일찍 치료하면 몸에는 적은 양의 감염된 세포가 머무른다. 그럴 경우 면역 시스템은 감염체들을 쉽게 인지하지 못해 방어반응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늦게 치료하면 바이러스 번식률이 높아진다. 반면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시스템의 반응률은 압도적으로 강해질 것이다. 결국 약물과 면역 시스템 사이의 올바른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는 특정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적혈구 변형으로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는 아프리카 원주민, 왜소증이지만 유전자가 일반인과 달라 온갖 암으로부터 안전한 사람들, 에이즈에 걸리지 않는 10%의 유럽인까지. 14세기 페스트가 유행해 유럽인의 40%가 사망했다. 이 중 페스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특정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지니고 있었다. 바이러스가 세포 안으로 침투하기 위해 필요한 수용체에 돌연변이가 생겨 차단된 것이다. 공교로이 그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HIV의 침입도 막았다. 현재 유럽 백인의 10%가 이에 해당한다.

전 세계 약 7000만 명이 HIV에 감염되고 그중 절반이 죽음에 이르렀다. 현재까지 완치된 사례는 단 한 건. 조기 치료 후 치료제 없이 HIV 바이러스가 감지되지 않은 아이들은 단 세 명뿐이다. 그럼에도 남아프리카의 여자아이가 잘 견뎌내고, 조기 치료의 성공 사례들이 확장된다면 희망은 충분하다. 이번에 소개된 아이는 유전자와 상관없이 HIV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다. “지금껏 밝혀진 바에 따르면”, HIV를 극복할 가능성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김재호 과학평론가
#에이즈#사이언스#h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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