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지나간 자리에 작열하는 태양처럼, ‘프로듀스 101’의 돌풍이 지나간 뒤의 2017년 여름은 그들을 응원했던 ‘국민 프로듀서’들에겐 그 언제보다 뜨거운 계절이 되고 있다. 올봄 우리를 웃고 울렸던 연습생들이 보이그룹으로, 솔로 가수로 멋지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끝났지만 현실에서의 서바이벌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뒤늦게 고백하자면, 새벽 두 시까지 잔인하게 이어지던 그 프로그램의 최종회를 보다가 나는 조금 울컥했다. 내가 응원하던 연습생이 탈락해서가 아니라, 그 시각까지 연습생 한 명 한 명의 치열함에 목이 터져라 장외 응원을 보내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저렇게나 많은 연습생 사이에서 노력한다고 뭐가 되겠냐’던 초반의 회의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회를 거듭해가며 소년들의 간절함에 감정을 이입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노력의 ‘가성비’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 모습이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것은, 요즘처럼 노력이라는 가치가 홀대받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노력해 봤자 노력한 만큼 이루기 힘든 사회에서,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프레임은 역설적으로 죽어라 노력하는 사람들의 치열함을 빛바래게 했다. 노력이 노오력의 공격을 받는 동안, 꿈이라는 단어는 낯간지러운 낡은 말이 되었고, 누군가의 치열한 오늘엔 응원 대신에 이런 핀잔이 따라붙었다. “뭘 그렇게까지 빡세게 하냐, 그래 봤자 너만 힘들지.” “너무 그렇게 팍팍하게 살지 마라. 어차피 다 이루지도 못할 거.”
많은 경우에 노력은 보상받지 못한다. 이건 팩트다. 그러나 ‘그러니까’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훈계와 ‘그럼에도’ 누군가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노력은 다르다. 후자의 치열함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인생엔 그렇지 않은 삶에 비해 더 많은 좌절의 폭풍우가 친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그런 궂은날을 선택해가며 사는 데에는, 좌절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크기의 간절함이 있다. 투자한 노력의 대부분을 돌려받지는 못할지언정, 타는 듯한 현재의 갈증을 풀기 위한 방법을 찾고, 찔러보는 시도라도 해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치열하게 소진한 그 에너지가, 다시 오늘을 내일로 밀어주는 가장 센 삶의 동력이 된다.
덮어놓고 “넌 왜 노력하지 않아? 노오력을 해!”라는 말이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거꾸로 ‘뭐 하러 그렇게까지 노력하느냐’는 시선에도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노력해도 안 되는 세상이 문제지,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노력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혹은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노력해볼 것인가의 여부는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다. 그 치열함은 타인이 강요할 수도, 반대로 폄하할 수도 없다.
현재의 상태를 원하는 다른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엔 당연히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언제가 될지 모를 변화의 순간을 위해 소중한 오늘을 쪼개 공부를 하고, 아직은 말도 안 되는 계획과 씨름하느라 밤을 늘이는 일들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끔씩 의지와는 다른 버거움이 훅 찾아들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치열한 그대, 꺾이지 말기를. 외롭지만, 이따금 핀잔을 듣겠지만, 언젠가 치열함이 ‘치이열함’이 되는 날이 올지라도, 본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양보하지 않기를. 오늘도 조금씩 조금씩 꿈을 현실로 분갈이 중인 당신의 치열함을, 나는 치열하게 응원한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단지 간절함만으로 이룰 수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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