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인사낙마, 커진 의구심… 靑 내부소통에 문제없나
진영 안 따지는 인재발탁… 블라인드 채용은 윗물부터
응집력 강한 조직 쉽게 붕괴… 다른 생각과 목소리 수혈로
‘동질성의 함정’서 벗어나야
요즘 문화계에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을 꼽는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빠질 수 없겠다. 휴가 중에 읽고 추천한 책 ‘명견만리’, 바쁜 틈 쪼개어 관람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명견만리’는 판매량이 20배 늘어 하루키 신작 소설의 아성을 위협하고 ‘택시운전사’는 800만 관객을 넘어 올해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문 대통령 후광’이 다른 문화 분야에도 두루 퍼지면 좋겠다. 예컨대, 미술 담당을 했던 필자 소견으로 폴란드 출신 미디어아트의 거장 크시슈토프 보디치코(74)의 회고전은 대통령 추천을 마땅히 받을 만하다. 이 전시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이웃한 금호미술관에서는 때마침 대통령의 아들 준용 씨가 참여한 미디어아트 전시도 개최 중이다.
보디치코는 노숙자 난민 등 발언권이 봉쇄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해준 작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서로 다른 생각의 공존을 존중하는 태도는 동유럽에서 서구로 이주한 자신의 체험에서 출발했다. 백범 김구를 테마로 한 신작 ‘나의 소원’은 문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 가질 만한 작품이다. 출마 선언 후 첫 현장 행보로 찾은 곳도, 어제 광복절 기념식에 앞서 찾은 곳도 백범 묘역이었으니 말이다.
‘나의 소원’은 바로 오늘, 2017년 한국 사회의 초상을 보여준다. 백범 동상 위로 다양한 정치적 생각을 가진 13명의 얼굴과 목소리가 차례로 투영된다. 세월호에 자식 잃은 어머니와 태극기 집회 참여자가 같은 작품을 통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적’을 볼 수 있다. 진영논리에 갇힌 우리 문화 풍토에서 상상할 수 없는 조합이다. 왜 백범일까. ‘내가 아는 한 김구는 다른 의견이 존재할 여지가 있는 나라를 생각했다’―보디치코가 보는 백범의 이미지다.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이 우리 현실을 어찌 이렇게 섬세하게 짚어냈을까. 전시를 준비했던 이수정 학예사의 설명은 간단했다. “그는 늘 물었고 귀 기울여 들었다.” 작년 말 촛불과 태극기 집회를 지켜본 작가는 이 학예사에게 물었다. “둘 다 민주주의와 나라를 위한다고 외치면서 왜 서로 소통하지 않는가.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끼리만 얘기하면 무한 반복에 그칠 뿐인데….”
동질성의 함정을 경고한 작가의 말을 전해 들으며 문득 인사 실패가 떠올랐다. 대통령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이들이 고위직 후보에 오르고 낙마하길 반복했다. 그 시리즈의 최신 사례인 박기영 씨는 사퇴 후 자신에 대한 반대 여론을 ‘마녀사냥’으로 맞받아쳤다. 앞서 청와대는 박 씨의 인선 배경을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과(過)를 덮을 만한 공(功)이 있다’는 대통령 발언을 대국민 메시지로 전했다. 보수 쪽에서 이승만 박정희 평가가 나올 때마다 흔히 썼던 얘기다.
‘과’를 알면서도 그 흠결에 대한 과학계와 여론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묻지 않았거나, 아니면 건의했는데도 듣지 않은 것인가. 청와대 내부의 집단사고 경향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그 근저에 ‘대통령의 뜻’에 못 박힌 1인 중심 사고 시스템이 자리한 것은 아닐까. 설마 그렇다면 이전 정권들과 차이가 없는 셈이다. ‘탈(脫)권위’를 워낙 강조하길래 재래식 위계 관계에서 자유로운가 했는데 이견과 이의를 독려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심증이 짙어진다. 덧붙여, 새 정부가 강조한 ‘블라인드 채용’이야말로 고위직에서부터 시작했어야 옳다. 공공부문에 성별 학력 등을 안 보고 인재를 찾아보라 했으면 이념 진영도 안 보고 진짜 보석 같은 인재를 가려내는 모범을 보이는 게 맞는 순서 아닐까.
사회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응집력 높은 집단의 붕괴를 이렇게 설명했다. “동질성이 결합되면 집단사고의 위험은 극에 달한다. 리더의 선택이 잘못되면 조직 전체는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된다.” 집단사고가 집단사고(事故)로 연결될 위험에 대한 경고다. 우두머리의 잘못된 선택에 심기보호 시스템이 장착되면. 지금 북한이 그런 모습 아닌가.
다시 보디치코로 돌아가 보자. 날 선 문제의식과 폐부를 찌르는 울림의 균형으로 사회비판적 예술의 품격을 보여준 그는 일하는 방식도 민주적이었다. 이 거물급 작가는 지시하기보다는, 현장 설치를 돕는 비정규직까지 모든 이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반복하고 의견을 경청했다. 무엇보다 ‘나의 소원’을 준비하는 내내 그가 강조했다는 말에서 한국 정치가 한 수 배워 업그레이드되면 좋겠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면 과정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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