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혹여 남에게 해로우면 비록 산더미처럼 얻을 수 있더라도 하지 않았다
有利於己 或害於人 則得之雖若丘陵 不爲也 (유리어기 혹해어인 즉득지수약구릉 불위야)
―이유태 ‘초려집(草廬集)’》
사람이 어떤 일을 접하였을 때에 일반적으로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 일이 나에게 이로울 것인가 여부다. 다른 사람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라면 이익의 추구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다.
현대사회에서 이익과 이윤의 추구는 결코 잘못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사회적으로 권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정당한 수단을 통해야 하고,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조건이어야 한다. 현대의 산업구조에서 갑과 을은 대등한 위치가 아니다. 갑은 돈을 쥐고 있고 을은 물건 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 권력은 ‘돈’이다. 이러한 돈을 쥐고 있는 갑의 권위에 을은 대항할 수단이 별로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명의 공급원인 돈과 맞서는 방법은 목숨을 거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위의 글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유태가 부친의 묘지문에서 부친의 평소 모습을 설명한 글의 일부이다. 그는 또 항상 온화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였다고도 했다. 나에게 아무리 이득이 되더라도 나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해로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큰 이득이 주어지더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의 입장에서 남의 이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일을 행하고 있다. 어쩌면 상대에게 그러한 피해가 갈 것이라는 인식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잘못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부끄러운 줄도 알고 바로잡을 수도 있는데, 부끄러움도 없고 잘못인지도 모르는 이런 사람들은 도무지 인간적으로 구제해 줄 아무런 방도가 없다.
이유태(李惟泰·1607∼1684)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초려(草廬)이다. 천거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번번이 사직을 하고 학문에 힘썼다. 특히 예학(禮學)에 정통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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