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세진]한국GM 철수 카드의 고차방정식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3일 03시 00분


정세진 산업부 기자
정세진 산업부 기자
“한국에 80억 달러를 추가 투자하려는데, 통상임금 문제를 한국 정부가 해결해 달라.”

2013년 5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 당시 댄 애커슨 제너럴모터스(GM) 회장은 투자 카드를 내밀며 통상임금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그해 말 대법원은 통상임금을 확대하는 판결을 내리면서도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면 소급분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신의성실원칙’ 예외를 분명히 했다. 이후 한국GM은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칙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80억 달러 투자 유치는 공수표가 됐다.

22일 시작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에서도 미국 정부를 앞세운 GM 본사가 한국GM의 ‘철수 카드’를 들고 특혜를 요구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당초 미국은 FTA 개정의 주요 이유로 자동차 부문의 불균형을 꼽았다. 한국 업체들은 미국에서 차를 많이 파는데 미국 차는 한국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된 한국 차는 약 140만 대로 이 중 60만여 대가 한국에서 생산됐다. 반면 미국에서 생산해 한국에 들여온 물량은 5만여 대에 그친다. 절대 규모로는 불균형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에서 생산한 물량을 더해 각 시장의 점유율을 비교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국 시장은 연간 1750만 대, 한국은 180만 대의 차가 팔린다. 한국 차의 미국 시장 점유율이 8% 안팎인 데 비해 한국GM의 물량을 합한 미국 차의 한국 시장 점유율은 10%에 이른다. 미국도 한국 정부의 이 같은 논리를 알고 있어 무조건 기계적 균형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국내 자동차업계는 미국의 속내가 미국산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차량 물량을 한국에서 대폭 늘리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GM의 철수를 유보하는 카드로 맞바꾸자는 전략이다. 한미 당국은 2010년 FTA 타결 이후 안전 기준에 대한 한국 내 별도 승인 없이 들여올 수 있는 차량을 연간 2만5000대까지 늘렸다. 한국GM은 최근 수년간 이런 규정을 이용해 준대형 세단인 임팔라 등을 한국에서 생산하지 않고 미국에서 들여와 팔았다. 하지만 2만5000대라는 기준은 임팔라 같은 단일 모델 판매량에 국한되지 않는다. 해당 회사의 전체 수입 물량을 포함한다. 특정 OEM 차량이 잘 팔리더라도 일정 시점에서는 팔지 못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의 안전 규제와 관계없이 들여올 수 있는 물량만 늘어나면 인건비 비중이 큰 한국에서 굳이 자동차 생산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미국에서 만든 인기 차종을 한국에서 쉽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GM은 세계 곳곳에서도 투자나 공장 철수 등을 내걸고 해당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는 전략을 써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를 앞세운 GM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어떻게 될지 득실을 따져야 한다. 이미 가동률이 바닥을 치고 있는 한국GM의 공장들은 앞으로 쉬는 날이 더 많아지고 일자리는 줄 것이다. 한국GM의 국내 대주주로서 철수 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KDB산업은행은 “한국GM이 생산시설을 아예 철수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논리를 펼지도 모른다. 한미 FTA와 한국GM 철수라는 고차방정식을 한국 정부가 어떻게 풀어낼지 산업계가 지켜보고 있다.

정세진 산업부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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