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60>군산 임피역과 ‘장미’의 진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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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건축된 전북 군산의 임피역.
1936년 건축된 전북 군산의 임피역.
유명 사진작가 민병헌은 3년 전부터 전북 군산에 산다. 군산에 들렀다 근대의 흔적에 매료되어 그 즉시 경기 양평 작업실을 정리하고 군산으로 옮겼다. 요즘 군산에 가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남아 있는 건물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70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성당 빵집과 중국집 빈해원에도 가고, 초원사진관에 들러 ‘8월의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런데 군산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군산 도심이 아니라 외곽의 한적한 곳에 있는 임피역이다. 1924년 열차 운행을 시작한 이 역은 군산선의 간이역이었다.

군산선과 임피역은 일제강점기 식량 수탈의 상징이었다. 당시, 기차는 전북지역에서 생산된 곡식을 가득 싣고 뿌연 연기와 굉음을 내뱉으며 임피역을 지나 군산항까지 달렸다. 군산항엔 미곡 창고들이 늘어났고, 인근 장미동(藏米洞)이란 지명에 그 수난사가 담겨 있다.

임피역은 광복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임피 사람들의 공간이 되었다. 군산지역 공장에 취직한 청년들은 통근 열차를 타고 나가 열심히 돈을 벌었고, 학생들은 통학 열차를 타고 군산 익산 전주로 나가 청운의 꿈을 키웠다. 여인들은 새벽 열차를 타고 군산항에 나가 생선과 젓갈을 구입해 내다 팔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다른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군산선 이용객은 부쩍 줄었다. 그 여파로 2006년 임피역에서 역무원이 사라졌다. 이어 2008년 1월 말 통근 열차가 없어지더니 그해 5월 임피역의 열차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임피역에 가면 그 흔적들이 잘 남아 있다. 1936년에 지은 역 건물은 단순하다. 경사면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 모양이기에 멀리서 보아도 반듯하고 단정하다. 역무실 공간에는 책상 타자기 금고 등 예전에 사용했던 이런저런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역 건물 옆에는 붉은 철탑 모양의 오포대가 우뚝 서 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낮 12시가 되면 사이렌으로 정오를 알려주던 것이다. 오포대 옆에는 물이 콸콸 나오는 식수 펌프도 있다. 언제 저런 시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열차 객차를 활용해 만들어 놓은 전시 공간도 흥미롭다.

임피역은 언제 가도 호젓하다. 건물의 파스텔톤 옥빛이 들판의 색깔과 참 잘 어울린다. 드러내지 않고 늘 담백하게 서있는 군산선 임피역, 어찌 보면 민병헌의 흑백사진 같기도 하고, 가을에 가면 더 좋은 곳이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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