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헌재]은퇴하는 이승엽과 “오빠, 밀어 쳐”의 추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일 03시 00분


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국민타자’ 이승엽(41·삼성)과 이별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삼성은 10개 팀 중 9위에 머물고 있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는 힘들다. 등번호 36번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 이승엽’을 볼 수 있는 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삼성의 마지막 방문경기를 주최하는 상대 팀들은 이승엽과의 이별을 기념하는 특별한 행사를 열고 있다. KBO리그 최초의 ‘은퇴 투어’다. 첫 해당 팀이었던 한화는 이승엽에게 보문산 소나무 분재를 선물했다. 이승엽이 홈런으로 대전구장을 둘러싸고 있는 보문산을 넘겼다는 의미를 담았다. kt는 이승엽의 좌우명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적은 현판을 선물했다. 넥센 선수들은 이승엽의 등번호가 새겨진 ‘스페셜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섰다. 9월에 은퇴 투어를 치르는 다른 팀들도 색다른 아이디어로 이승엽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야구기자들에게도 이승엽은 특별한 존재다.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600개 넘는 홈런을 치면서 무수한 기삿거리를 제공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나온 역전 결승 홈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친 2루타 등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명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이승엽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만나본 선수들 가운데 최고의 인터뷰 상대였기 때문이다. 이승엽은 달변은 아니다. 그렇지만 인터뷰를 할 때면 진심을 다한다. 그래서 어떤 인터뷰이건 울림이 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지는 말투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몇 해 전 겨울 일본에서 부진한 시즌을 보낸 그가 훈련 중이던 대구를 찾았다. 인터뷰를 거절해도 이해될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한 시즌이었다. 인터뷰를 승낙하는 대신 그는 조건을 하나 내걸었다. 야외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추운 데서 해야 인터뷰가 빨리 끝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를 오래 취재한 야구기자들끼리 얘기를 나누다 보면 누구나 이런 미담을 한두 개쯤 갖고 있다.

“오빠, 밀어 쳐”란 유행어가 태어난 배경 역시 기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2003년 한 시즌 아시아 홈런 신기록에 도전하던 그는 53호 홈런을 친 뒤 한동안 부진에 빠져 있었다. 수십 명의 기자는 그가 홈런을 치건 그렇지 않건 매 경기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경기 전후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다.

마침내 54호 홈런을 친 뒤 그는 기자들에게 “오늘 아내가 ‘오빠, 밀어 쳐’라고 응원해 줬다.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당시 야구 문외한이던 아내 이송정 씨가 밀어치기의 중요성을 알고 그런 얘기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디선가 밀어 쳐야 공을 끝까지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말일 텐데, 이승엽이 그 말을 일약 유행어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홈런을 따라다닌 기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었다. 그해 이승엽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당시 신기록이던 56호 홈런을 쳐냈다. 역사적인 56호 홈런도 ‘밀어서’ 친 홈런이었다.

대한민국에 유명한 운동선수는 많았다. 하지만 대스타 가운데 이승엽처럼 언론 관계가 원만했던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의 마지막 경기, “오빠, 밀어 쳐”란 문구가 들어간 ‘스페셜 유니폼’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헌재 스포츠부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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