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 ‘서울 불바다’ 발언… 가소로웠지만 지금은 공포감
빈국 北 단시간 ICBM 보유 비결… 3代 ‘한 놈만 패며’ 시행착오 축적
‘wishful thinking’에 빠진 南… 北 실패만 보고 ‘실패의 축적’ 못 봐
대기권 再진입 성공했을 수도
“여기서 서울은 멀지 않다. 전쟁이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송 선생 당신도 살아남지 못해!” 지금이야 북한이 툭하면 퍼붓는 ‘서울 불바다’ 발언의 연원은 1994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판문점 실무접촉에 나온 북측 박영수 단장이 남측 송영대 대표에게 쏘아붙인 말이다. 현장 취재 중이던 나는 그날따라 북측 기자들의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조선중앙통신 기자는 거만한 표정으로 내게 “우리가 서울을 점령하면 박 선생은 내가 특별히 봐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가소로웠다. 당시 남북한은 경제력은 물론이고 군사력에서도 확연한 격차가 있었다. 북한엔 핵무기가 없었고, 장거리 미사일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첨단 주한미군을 기반으로 한 한미 합동전력이 압도적 우위였다. 그러나 지금 북측의 ‘서울 불바다’ 협박은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들린다. ‘미국 본토 불바다’ 발언에 세계 최강 미국마저 위협을 느낄 정도다. 어제는 ‘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6차 핵실험까지 감행했다. 지난 20여 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 여기서 눈을 잠깐 경제로 돌려보자. 산업과 기술 혁신 분야에서 화제가 된 책 ‘축적의 시간’은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한계에 다다른 이유를 ‘개념설계 역량 부족’이라고 진단한다. 개념설계 역량이란 산업 기술에서 창의적이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그런데 이 역량은 교과서나 논문에서는 배울 수 없고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거쳐 습득한 지식과 노하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산업화 역사가 오래된 선진국들은 긴 시간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 역량을 축적해왔다. 그런데 산업화 역사가 일천한데도 광대한 공간의 장점을 이용해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개념설계 역량을 축적하는 나라가 있다. 중국이다. 중국은 2016년까지 1만9000km 이상의 고속철을 자국 내에 부설했다. 단연 전 세계에서 가장 길다. 대형 참사를 비롯해 많은 사고가 잇따랐지만, 그 실패를 통해 압축적으로 배웠다. 그것이 2015년 선진국을 물리치고 샌프란시스코 고속철 사업을 수주하는 결과로 나타났다.(이정동의 ‘축적의 길’)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자. 핵과 미사일 개발 역사가 짧을뿐더러 중국처럼 공간도 넓지 않은 세계 최빈국 수준의 북한이 어떻게 소형화한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을까. 그 비결은 ‘실패의 축적’이라고 나는 본다. 북한의 독재 3대는 핵 미사일 개발을 국가의 제1 목표로 삼고 대를 이어가며 내부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 결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개발 시간을 압축했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북한은 철저하게 자기 시간표대로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 왔다”고 말했다.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하든,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받든 내부적으로는 개발 시간표를 지켜 왔다는 것이다. 외부에는 “비핵화는 김일성 수령의 유훈(遺訓)”이라고 떠들면서도 내부적으로 핵 미사일을 만지작거려온 것이다. 목표 달성 시점이 되니, 이제는 그 얘기마저 쏙 들어갔다. 과거 미사일 실험을 ‘평화적인 인공위성 발사’라고 하던 주장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다.
북한이 그러는 사이 우리의 과거 정권은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북한 같은 나라가 어떻게 ICBM을 개발할 수 있겠느냐’는 편의적 낙관론(wishful thinking)에 빠져 보고 싶은 것만 봐 왔다. 2012년에도 북한의 장거리 로켓 파편을 회수해 분석했지만 ICBM 개발을 먼 얘기로 치부했다. 북한의 실패만 보고, ‘실패를 통한 축적’에는 눈을 감아 버린 것이다. 1983년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자 일본 미쓰비시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 싶은 것만 본 탓에 오늘날 세계 1위에 오른 삼성 반도체의 미래를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지금도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의 대기권 재진입 기술은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란 관측이 있다. 그러나 곧 확보하거나, 아니 이미 확보했을 수도 있다. 국가의 역량을 쏟아 부어 ‘한 놈만 패는’ 데는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북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편의적 낙관론’이 과거 정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데 있다. 대화로 북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냉엄한 현실을 한쪽 눈만 뜨고 보는 것은 아닌가. 남쪽이 그러거나 말거나 어제도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무섭게 축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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