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박민우]이집트 군부정권의 ‘통닭구이’ 만행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1일 03시 00분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삽화로 묘사한 ‘통닭구이 고문’
장면. HRW 홈페이지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삽화로 묘사한 ‘통닭구이 고문’ 장면. HRW 홈페이지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전두환 정권 초기 부림사건을 그린 영화 ‘변호인’을 본 뒤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국밥집 아들 진우 역을 맡은 임시완이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다. 깍지 낀 손을 무릎 아래로 집어넣고 그 사이에 막대기를 넣어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는 ‘통닭구이 고문’ 장면은 특히나 충격적이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표현하기 위해 임시완은 당시 체중을 50kg까지 감량했다고 한다. 부림사건의 실제 피해자들은 통닭구이를 가장 잔인한 고문으로 꼽았다. 모진 고문으로 없는 죄를 뒤집어씌웠던, 참으로 엄혹한 시대였다.

지금의 이집트가 딱 그 꼴이다.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물론이고 정치적인 색깔이 없는 소시민들까지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 최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공개한 63쪽짜리 보고서에는 이러한 고문의 실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학생 카림은 2015년 10월 카이로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 참가했다 경찰에 연행됐다. 그는 양팔을 뒤로 꺾인 채 문 꼭대기에 매달아 두는, 일명 ‘비둘기 고문’을 당했다. 그는 “어깨가 밖으로 빠져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며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 어떻게 하면 문에서 내려올 수 있을지 오로지 두 가지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인 살렘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통닭구이 고문’을 받는 동안 “뭐든 원하는 대로 불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회계사로 일하던 칼레드는 2015년 1월 국가안보국에 긴급 체포돼 11일 동안 전기충격기를 비롯한 각종 고문에 시달렸다. 한겨울에 옷이 벗겨진 채 에어컨이 최저 온도로 설정된 ‘냉장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조 스토크 HRW 중동 부국장은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이 경찰과 보안당국자들이 언제든 고문할 수 있도록 ‘그린 라이트’를 줬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이집트에서는 짧았던 ‘아랍의 봄’이 끝난 뒤 군부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2011년 시민혁명 이후 이듬해 대선에서 무슬림형제단 지도자 무함마드 무르시가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 됐지만 지나친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이 화를 불렀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재개됐고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시시 장군은 “시민들을 지지한다”며 2013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과도정부는 무슬림형제단과 민주화 세력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군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1300여 명이 사망했고, 법원은 무르시 지지자 1200여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신군부가 집권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이집트 시민사회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국제사회는 시시 대통령이 30년 독재자인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보다 더 잔혹한 통치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달 30일 워싱턴포스트(WP)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월 시시 대통령을 백악관에 초대한 데 이어 5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테러와의 전쟁’에 힘을 실어주면서 아랍 국가의 인권이 더욱 악화됐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시시 대통령은 5월 비정부기구(NGO)를 강력히 규제하는 관련 법안을 승인했고 ‘국경 없는 기자회(RWB)’를 포함해 424개 웹사이트를 폐쇄했다. 최근 유엔 조사위원회는 이 같은 조치가 “대테러리즘보다는 억압에 가깝다”고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7월 한 달 동안 인권단체 이집트권리와자유위원회(ECRF)에 보고된 비사법적 살인(고문치사, 즉결처형 등)은 61건으로 상반기(1∼6월) 보고 건의 두 배가 넘는다.

이집트 시민사회가 이토록 혹독한 계절을 보내고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신군부 정권이 갖고 있는 두려움 때문이다. 시민들이 맛본 짧지만 강렬했던 민주주의 혁명이 또다시 들불처럼 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도저히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군부 권위주의로는 민주주의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앗아갔던 한국의 신군부 정권의 권위주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7년 만에 스러졌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법이다.
 
박민우 카이로 특파원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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